요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통치와 섭리를 믿을 때 우리의 인생이 어떤 고난에 처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기뻐하며 감사하며 진정으로 살아있는 삶, 생기 발랄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어떤 삶일까요? 또 주님의 제자의 삶이란 어떤 삶일까요? 우리는 모두 다 주님을 믿고 따라는 그리스도인들이고 주님의 제자들의 삶을 사는 자들이기에 우리는 한번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고민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이 세상이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이고 또 이 세계는 너무나 아름답고 좋은 세계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창1장은 6일간의 창조의 기사가 기록되어 있는데 6일간의 창조의 기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창조된 세계를 보시며 보시기에 좋았다는 기록이 빠짐 없이 담겨 있습니다. 마지막 6일째 사람까지 모든 창조를 마치신 후에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창1: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참으로 아름다운 세계, 참으로 좋았던 이 세계였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자연을 둘러보면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훌륭하며 그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세계임을 알게 됩니다. 지금 가을인데요. 울긋불긋 단풍이 들어 너무나 아름다운 경치를 보게 되고 또 이른 아침 일출과 저녁놀이 지는 석양을 보고 있노라면 감탄 그 자체입니다.
제가 총회 일로 제주도에 약2주 정도 있으면서 틈틈히 시간이 날 때 근처 바닷가에 가서 제주도의 뛰어난 경치를 봤는데요. 끊임없이 생겨나오는 여러가지 일로 인해서 심신이 고단하고 피로했는데 아름다운 바다와 파도와 하늘과 곳곳의 경치를 보고 나면 다시금 힘이 생기고 충전이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우들에게 했던 바울 사도의 말씀처럼 이런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 살면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삶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여러분들, 우리의 일상이 매우 바쁘고 여유가 없다 할지라도 우리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지어주신 이 아름다운 세계를 놓치고 산다면 나중에 너무나 후회스러울 것 같습니다. 시간을 내서 하나님께서 수고로이 지어주신 이 아름다운 세계를 경험하고 누리며 그것에 감사하며 기뻐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곁에 가까이 있는 이 아름다운 세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그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사는 것일까요? 창1장에서 심히 좋았던 세계가 창6장에 와서는 하나님이 한탄하시고 근심하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창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6:7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서 이렇게 하나님께서 한탄과 근심하시며 이 땅의 심판을 계획하신 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하나님의 고민이시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심판이란 어떤 것일까요? 죄에 대한 벌로서 다 진멸하고 멸망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일까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심판은 회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일그러지고 어그러지고 부서지고 찌그러지고 뒤틀린 모든 것들을 다시금 회복시키는 것 –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심판입니다. 우리는 이 심판을 다른 말로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 속에 들어온 세균을 없애고 건강한 몸으로 치료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이고 구원입니다. 이 과정이 힘들 수 있습니다. 병에 걸린 사람을 치료하는 과정에는 쓴 약도 먹어야 하고 주사도 맞아야 하고 필요하면 수술도 해야 하고 또 이후에 재활치료도 해야 하고 꾸준히 몸 관리를 위해서도 운동도 해야 하고 등등. 이런 여러가지 과정이 필요합니다.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병든 자들을 고치고 회복시켜주기 위한 과정인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의 심판 이후에 노아가 새하늘과 새 땅에 와서 포도원을 건설하고 포도주에 취해 벌거 벗고 자는 나옵니다. 이것은 단순히 술 마시고 술주정하는 모습을 그려놓은 것이 아니죠. 창49장에 야곱이 유다에게 주었던 예언의 말씀처럼 늘 성령의 포도주에 취해 죄로 더럽혀진 자신의 행실을 성령으로 빨아가는 성화의 삶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아는 성설히 이런 삶을 잘 따라 살았지만 노아의 아들 함이 아버지의 삶을 따라 살지 못해 저주를 받습니다. 어떤 저주입니까? 종이 되는 저주입니다. 종은 자유도 없고 소유가 없습니다.
이 세상은 무한한 자유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유도 없고 소유도 없는
예수님의 시대에도 동일하게 심판의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앞서 말한 것처럼 회복이고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노아의 때에는 하나님께서 물로서 심판하셨지만 예수님의 시대에는 말씀이 불이 되어 모든 죄를 태우는 심판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심판을 받으면 치유가 되고 회복이 되고 구원이 되는 것이고 심판을 받지 못하면 그는 여전히 병자와 같은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죄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여전히 죄 짓고 죄 가운데 신음하며 원인도 모른 채 고통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은 우리 몸 속에 병균을 없기 위해서 치료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곧 치열한 싸움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이 땅의 회복을 위해서 죄와의 치열한 싸움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모습을 그려놓은 것이 오늘 첫번째 본문의 말씀입니다.
요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한은 어떤 사람입니까? 엘리야의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와서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할 다리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누구보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어떤 사명을 가지고 계시고 어떤 일을 하시는지를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주님의 이렇게 증거했던 것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로부터 용서함을 받고 구원함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치료제가 우리 몸 속에 들어가면 우리 몸 속에 있는 세균과 싸워 우리를 병으로부터 낫게 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치료제는 사라지게 됩니다.
이것이 주님의 모습이셨습니다. 그럼 주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두번째 본문을 보겠습니다.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먼저는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무거운 짐을 대신 져 주심으로 우리는 쉼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라 주님은 나에게 와서 나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지신 그 짐 그 멍에를 이제는 주의 제자들, 주를 믿고 따르는 자들이 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는 자들의 삶입니다.
주님의 멍에를 우리가 나눠지고 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안에는 말할 수 없는 감사와 감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고 다시금 짐을 지고 사는 삶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자들에게 남겨진 삶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고 난 이후에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주님으로 말미암아 내 짐이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주님의 멍에를 지라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주님의 멍에를 져야 할까요? 이것만 없으면 이제는 좀 자유롭게 편하게 즐겁고 행복하게 인생 즐기면서 아름다운 자연도 실컷 구경하고 관광도 하고 놀러도 다니고 그렇게 살고 싶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구원받은 자들에게 나의 멍에를 지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죠? 왜 입니까?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 그 중에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 친구 동료 등등. 이렇게 많은 사랑하는 자들을 내버려둘 수 없잖아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우리들을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아들을 보내셔서 구원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사랑하는 자들이 죄 가운데 고통받고 사는 것을 내버려둘 수 없는 것이 아닙니까? 아파하는 자녀를 어떤 부모가 내려버두겠습니까? 어떻게든 그 병을 고쳐주려 하지 않겠습니까?
마15장에는 귀신 들린 딸을 고쳐주기 위해서 주님을 앞에 나아가 간절히 구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 15: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15: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15: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15: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15: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15: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15: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여기 보면 자기 딸을 낫게 해주려고 주님 앞에 갔는데 주님은 이 여자를 처음에는 외면하시고 두번째는 개 취급을 하셨습니다. 참으로 멸시와 천대를 받는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자는 포기하지 않고 믿음을 드러내어서 자기 딸이 고침을 받게 했습니다.
자신은 어떤 취급을 받더라도 좋으니 자기 딸을 꼭 고침받게 하고자 하는 이 마음 –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고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말할 수 없는 치욕과 고통과 수모와 천대를 받으시고 마침내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이것은 병든 이 땅의 우리 모두를 치유하고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온몸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렇게 어떻게든 고쳐주고 치유받게 하고 구원받게 하고 싶은 사랑하는 자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그들을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의 짐을 우리가 대신 져서라도 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멍에는 주님의 것이 아닙니다. 원래 죄인된 우리 모두의 짐이었는데 그것을 주님의 것으로 여기시고 그것을 지고 가신 것입니다. 이 사랑의 마음이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이 사랑의 마음으로 서로의 짐을 대신 져 주는 것입니다.
짐이라는 것은 아무리 작고 가벼운 것이라도 누구나 지기 싫은 법입니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도 누구의 짐이 되기 싫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지라 하신 주님의 멍에는 사랑으로 지는 짐입니다. 이 짐은 세상에서 지는 짐과 다른 것입니다. 그러니 이 짐은 세상의 논리와 세상의 방식으로 지려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이 짐은 너무나 무거운 짐이 되어버립니다. 우리는 이 짐은 주님의 방식 다시 말하면 주님이 지시는 방식으로 져야 합니다. 그럴 때 이 짐은 매우 쉽고 가벼운 짐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방식이란 온유와 겸손의 방식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마음인데요. 어떻게 이 마음을 가지고 이 마음으로 살 수 있을까요?
살다보면 우리를 힘들게 하고 강팍하게 하고 거칠게 만드는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자녀를 키울 때에도 너무 힘들고 짜증날 때도 있고 화가 나고 그럴 때 있잖아요. 마지막을 보면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게 하시고 결국 우리를 영화롭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우리도 이 믿음 있다면 온유할 수 있고 겸손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왜 짜증이 나고 화가 나고 거칠어지는가? 뭐가 우리가 원하는대로 안되니까 그런 것입니다. 선이 되고 영화롭게 되어야 하는데 그게 안되는 것입니다. 하는 일마다 안되고 꼬이고 잘 되던 일도 엉키고 그러니 힘든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악도 선이 되게 하시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게 하시고 결국 영화롭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점점 보여지고 느껴지는 것입니다. 단순히 말로만이 아니구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즉 실체라고 했습니다. 바울사도는 이 믿음으로써 미래의 것들을 현실로 앞당겨 본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능력입니다. 우리도 이 믿음을 가진 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을 닮아 많은 이들을 구원하고 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사는 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