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al Church

 

18: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18: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18: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18: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18: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18: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18: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18: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18: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18: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18: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18: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한해를 돌아보면서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감사하지 않을 것도 따지고 보면 감사할 것이라는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우들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범사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모든 일에 라는 말이죠. 영어 성경으로 보면 in all circumstances 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든 상황이라는 말입니다. 모든 상황속에서 라는 찬양도 있습니다. 이 찬양은 주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인정하여 내 삶은 주님께 확정되었사오니 믿음으로 모든 상황 속에서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만을 의지하겠다라는 고백이 담긴 찬양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참 다양한 일들이 우리를 찾아옵니다. 우리의 집을 찾아오는 손님들로 비유하면 좋은 손님, 내가 기뻐하는 손님만 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사실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초대하지도 않은 불청객들이 찾아와서 우리를 괴롭히기도 하고 우리에게 많은 시련을 주기도 합니다.

모든 상황이라는 것은 기분 좋은 상황,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상황 뿐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피하고 싶고 도망치고 싶은 상황이나 정말 힘들고 괴롭고 생각하기도 싫은 상황도 있습니다. 이런 모든 상황 속에서 어떻게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할 수 있을까요?

,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이 비결을 비우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용서하라는 말씀인데요. 본문 앞 부분은 보면 베드로가 주님께 물었습니다.

18: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아마도 어떤 형제 중에서 베드로를 계속해서 힘들게 했던 형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주를 믿는 자이고 이미 구원을 받은 자이고 또 제자들 중에서 특별히 수제자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좀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용서해주고 넘어가려고 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것이 계속 반복이 되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 베드로가 이런 질문을 주님께 한 것이 아닐까요?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번까지 용서하면 되느냐고 말입니다. 일곱 번하면 되냐고. 베드로는 자신이 용서할 수 있는 최대치는 일곱번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우리도 우리가 생각하는 맥시멈이 있습니다. 이 정도하면 되겠지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고 하신 이사야서의 말씀처럼 베드로의 생각과 주님의 생각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18: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일곱 번 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생각하고 할 수 있는 최대치가 일곱번이었는데 주님은 일곱번씩 일흔 번까지도 용서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베드로에게 이 숫자는 무한대에 해당하는 숫자였던 것입니다. 즉 이것은 자신은 할 수 없는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불가능한 것을 왜 하라고 하실까요?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를 하나의 비유를 통해서 베드로를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겠습니다.

18: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18: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18: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18: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어떤 종이 주인에게 빚을 졌는데 결산할 때가 되어 갚으로 하는데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얼마나 빚을 졌는가? 일만 달란트의 빚을 진 것입니다. 이 빚은 자기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자신이 가진 모든 소유를 다 팔아도 갚을 수 없는 불가능한 금액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종이 엎드려 절하며 갚겠다고 참아달라고. 울며 불며 그렇게 애원을 하고 사정을 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 종의 주인이 그를 불쌍히 여겨서 모든 것을 탕감해주고 그를 놓아준 것입니다.

용서하다라는 말의 헬라어 뜻을 보면 보내주다 가게 놔두다라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를 붙잡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내가 계속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감옥에 그를 가둬 놓고 그를 보내주지 않는 것입니다. 붙잡혀 있는 것입니다. 용서는 그를 가게 놔주고 보내주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블랙 리스트에서 그를 지워야 합니다. 이 종의 주인은 이 빚진 종을 불쌍히 여겨서 그를 놓아주며 모든 빚을 탕감해주었습니다. 너무나 큰 은혜를 받은 것이죠.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 종이 탕감을 받고 나가서 이번에는 자기에게 빚 진 자기 동료를 만나서 그에게 자기 돈을 갚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18: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18: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얼마나 빚졌나 보니까 백 데나리온이라고 했습니다. 1달란트가 6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이 종은 일만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것입니다. 데나리온으로 환산하면 6천만 데나리온입니다. 이것은 백데나리온으로 나누면 6십만 데나리온입니다. 즉 이 사람은 자기가 탕감받은 빚의 6십만분의 1 조차도 용서해주지 못하고 자기 돈을 갚으로 옥에 가두어버렸습니다.

18: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18: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우리는 어떨까요? 적어도 예수 믿는 우리는 이 정도는 아니지 않을까요? 그러면 베드로는 어떨까요? 그는 예수 믿는 제자 중에서 수제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지금 주님께 물어온 것입니다. 형제가 죄를 범하면 일곱번 정도 용서하면 되느냐고 말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일곱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요? 말씀을 들어서 용서를 해야 한다는 것은 알겠는데 이것이 너무 힘든 것입니다.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그래서 자기 안에서는 답이 없으니 주님께 좀 위로도 받을 겸 물었는데 오히려 자기로서는 불가능한 답을 들은 것입니다. 주님께서 일곱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하라 고만 말씀하시고 끝났다면 베드로는 절망했을지 모릅니다.

주님은 자상하게도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를 비유로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의 빚을 전부 탕감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은혜라고 말합니다. 은혜가 내가 뭘 해서 내가 뭘 팔아서 갚을 수 없는 무한대와 같은 죄를 전부 탕감을 받은 것입니다.

바울이 롬320절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율법적인 행위 즉 인간적인 행위와 공로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는 죄인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인해서 우리가 죄인에서 의인이 된 것이고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항상 감사하고 범사에 모든 상황 속에서도 주님을 기뻐하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을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리니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동료가 자기에게 진 백데나리온 빚도 용서하지 못하는 이런 말도 안되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어떤 기능이 있습니까? 우리에게 베푸신 주의 은혜를 잊지 않고 다시금 기억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배와 멀어지고 말씀과 멀어지고 우리가 받은 말할 수 없는 은혜가 있더라도 결국은 희미해지고 잊혀져서 나에게 지은 작은 죄도 용서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18: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18: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18: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18: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자신이 탕감 받았던 빚, 자신이 용서받았던 죄가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게 무서운 것입니다. 또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 하지만 다시금 죄를 지을 수 있잖아요. 그 때 우리가 주님께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며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받아야 하는데 내가 형제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도 주님께 용서를 구할 명분이 없고 주님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에 보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라고 했는데 더 이상 이 기도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는데 어떻게 용서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16장에 보면

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게 되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린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처럼 우리가 이 땅에서 형제를 용서하면 하늘에서 우리가 용서함을 받게 되고 이 땅에서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면 하늘에서 용서함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자신이 받은 은혜와 용서함을 다시금 기억하지 않았을까요? 베드로는 나중에 주님을 세번 부인하는 말할 수 없는 죄를 짓게 됩니다. 도저히 같을 수 없는 일만달란트의 빚을 진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베드로를 주님은 책망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다시금 찾아오셔서 그에게 주님의 양들을 맡기시며 내 양을 먹이라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이런 말할 수 없는 사랑과 용서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는 주님의 양을 먹이는 목자로 변화가 되어 실로 많은 이들에게 주를 증거하고 주의 사랑을 전하며 많은 이들을 구원으로 인도하게 됩니다. 이제 베드로는 진정으로 사랑을 알고 용서를 아는 주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가 받은 사랑과 용서함을 깨달을 때 주님의 양을 먹이는 주의 진정한 제자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귀한 은혜를 다시금 기억하면서 그 은혜를 전파하며 많은 이들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그래서 아름다운 주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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