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al Church

 

고후1: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1: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1: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1: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오늘 말씀은 바울이 선교의 삶을 살면서 당했던 고난에 관한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고후1: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바울은 먼저 너희 고린도 교우들을 향한 바울이 믿음의 말합니다. 고린도 교우들이 고난에 참여했기에 위로에도 함께 참여하는 자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에 고린도 교우들을 향한 소망이었습니다. 이렇게 변화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고난의 삶에서 위로 받는 삶으로 바뀔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는 이런 소망이 있습니까?

우리가 사람을 볼 때 소망이 생겨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는 우리가 사람을 볼 때 소망을 가지고 봐야 하는 세계도 있지만 또 우리가 남에게 자신을 보여줄 때 소망을 보여주어야 하는 세계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연약해서 부족한 점이 있고 과거에 죄 지었던 모습., 부끄럽고 창피한 모습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이런 모습에 우리가 갇혀 있으면 안됩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어떤 부끄러운 과거의 모습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보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과거를 가지고 우리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나를 볼 때 또 서로를 볼 때 과거를 가지고 보면 안되고 과거를 가지고 판단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바울도 고린도 교우들을 볼 때 미래의 변화될 모습을 소망으로 삼고 그들을 대했던 것입니다. 이 소망이 견고하다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믿음을 가진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1: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은 아시아에서 당한 환란으로 인해 살 소망까지 다 끊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바울의 살 소망이었을까요? 여러분들에게는 무엇이 살 소망입니까? 무엇을 인해서 살아갈 힘이 생기느냐? 라는 것입니다.

나를 살아있게 하는 것. 삶의 기대와 소망을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땅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주는 그 어떤 소망이라도 결국은 다 썩어지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밟고 디디고 사는 이 땅은 사실 아담으로 인해 저주 받은 땅입니다. 저주 받은 땅에서 우리가 아무리 큰 소망을 품고 산다 할지라도 그 소망은 결국 저주 받은 소망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하늘 소망을 품고 살아야 할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도 보면

6: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썩을 양식을 얻고자 수고하는 인생이 아니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얻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양식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양식은 무엇이었습니까?

4: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주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이버지의 뜻이 무엇이겠습니다. 이 땅에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 이것이 주님의 양식이었고 이 양식을 주님께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소망을 붙들고 사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울에게 있어서 살 소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난이 너무 심해서 이 소망이 끊어졌다고 했던 것입니다. 몸이 아프면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납니다. 일단은 내가 먼저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내 발에 불이 붙었는데 무엇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붙들고 그렇게 열심으로 힘차게 살아왔던 바울도 고난 앞에 살 소망까지 다 잃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참으로 솔직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 힘든 고난 앞에서 살 소망을 다 잃어버리고 쓰러지고 무너져 버린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1: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은 극심한 고난과 환란이 있었으나 그러나 이토록 모질고 고통스런 환란이 있었던 것은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바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님, 저에게 왜 이런 극심한 환란을 주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환란 가운데 고난 가운데 아픔과 시련 가운데 바울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왜 하나님 나를 도와주시지 않고 오히려 나를 더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지금 내가 왜 이 고생을 하는데 왜 나에게 복을 주시지 않고 오히려 이런 고난을 주시냐고. 얼마나 바울 안에 하나님을 향한 정당한 불평과 원망이 있었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어떤가? 내가 뭔가 잘못했어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고 어떻게든 자신은 정당하고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고 의롭게 여기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탓합니다. 그러나 사도는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오는 고난을 가지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어떠하셨습니까? 자신의 죄가 아닌 우리의 죄를 인해 죄인이 되었습니다. 십자가라는 아주 잔인한 극형을 달게 받았습니다. 그 자리에서도 주님은 우리를 저주하지도 않으시고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으시고 오히려 모든 죄의 형벌을 자신의 것을 여기시고 온 몸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습니다.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자들이라면 우리도 이런 대속의 십자가의 삶을 살게 됩니다. 고난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올 때에 우리는 이 십자가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오직 하나님만 더 의지하기 위함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바울의 해석이 우리의 해석이 되기를 바랍니다.  

1: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 보십시오. 사도 안에 있는 이 큰 마음을 우리가 봐야 합니다.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다는 것입니다. 또 앞으로도 우리를 건져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에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큰 죄와 사망에서 건짐을 받은 자들이 아닙니까? 사탄의 어떤 유혹과 시험에도 비록 우리가 그 시험에 넘어지고 쓰러진다 할지라도 다시 우리를 견저주실 것이라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기도문에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게 구하옵소서.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고 하지만 우리가 연약해서 시험에 들고 악에 빠졌다면 우리를 구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며 하나님은 반드시를 건져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뭐를 잘 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굳게 붙들고 고난 가운데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고 하나님의 사랑만을 붙들고 사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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