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4: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오늘 첫번째 본문은 로마서1장의 본론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의 본론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만 잘 알아도 우리의 신앙은 달라집니다. 신앙의 시작은 먼저는 내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라는 것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모를 뿐더러 안다해도 잘 인정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어떻게 생각할까요?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복 사람이지. 나는 의인까지는 아니더라도 죄인은 아니야. 그래도 나는 나름 착하게 살려고 했고 어려운 사람 있으면 도와주려 했으며 내 자리에서 신앙적으로 살려고 기도하고 예배하고 말씀보고 등등. 또 도덕적으로 남에게 피해주지 않으려 애썼고 그러면서 내 일도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가 왜 죄인이고 나에게 왜 하나님의 진노가 있겠냐고. 그렇기 때문에 구원이라는 것도 잘 다가오지 않고 바라지도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한데 로마서는 우리가 왜 죄인인지. 내 안에 있는 죄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롬1장18절에서는 하나님의 진노라는 것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에게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불의로 진리를 막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진리를 막는 사람은 아닌가? 자신을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바울되기 전에 진리를 거르스고 진리를 막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때 바울도 자신이 진리를 막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이 이단의 도를 전하는 즉, 진리를 막는 사람들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들을 잡아 옥에 가두었던 것이 아닙니까? 스스로는 자기 자신을 정확히 보기가 어렵습니다. 거울이 있어야 자신이 보이듯이 나를 바로 보게 하는 것. 나를 정확하게 비춰주는 영적인 거울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말씀입니다. 말씀 앞에 자신을 늘 비춰봐야 합니다.
말씀 앞에 비춰진 나의 모습은 어떤가? 나는 진리를 강물이 흐르듯 잘 흐르게 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진리가 흐르지 못하게 거스르며 막고 있는 사람은 아닌가? 법이라는 한자를 보면 물이 흐르간다는 뜻입니다. 물이 어떻게 흐르나?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물이 흘러가는 이 자연스러운 것이 법이라는 한자입니다. 막히면 고이게 되고 고이면 썩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이라는 것은 이렇게 자연스럽게 흘러야 하는 것입니다. 거스르면 안되고 막으면 안되고 거꾸로 흐를 수 없는 것인데 우리는 하나님의 이런 법을 얼마나 잘 지키고 사는가?
순리가 있고 역리가 있습니다. 순리대로 살면 편하고 시원합니다. 그런데 역리로 살면 불편하고 답답합니다. 우리 안에 불편한 것은 없습니까? 우리 안에 답답한 것은 없습니까? 진리를 따라 살고 있는가? 진리를 막고 있는 나인가?
바울은 로마서에서 진리를 막는 것을 불경건과 불의라고 했습니다. 불경건이 하나님께 짓는 수직적인 죄라면 불의는 사람들에게 짓는 수평적인 죄입니다. 우리 속에는 이 두가지의 죄가 다 같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뿌리는 하나님께 짓는 수직적인 죄인 불경건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를 막는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이 불경건의 죄를 깊이 함께 보기를 원합니다.
이 불경건의 죄를 두 단어로 하면 불신과 불순종이고 한단어로 하면 교만입니다. 이 교만이라는 죄가 꼭 우상숭배라는 죄로 이어집니다. 우상숭배를 잘 봐야 합니다.
우상숭배라는 것이 뭘까요?
골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3:6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하나님의 진노라는 것이 여러가지 우리 안에 있는 죄로 인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하나가 탐심인데 이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했습니다. 왜 탐심이 우상숭배일까요? 자, 먼저 우리 안에 왜 탐심이 생길까요?
사람은 누구나 기쁨을 찾고 즐거움을 찾고 만족을 찾고 얻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무엇으로 기쁨을 얻고 만족을 얻을 수 있는가? 그것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이 잘못된 것입니까? 그렇지 않지요. 문제는 이 기쁨을 어디에서 찾으려고 하느냐? 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탐심의 문제는 첫번째 남의 것인데 그것을 내가 가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선악과는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나무의 실과는 다 주셨지만 선악과는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그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고. 내 것이 아닌 것을 탐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하와는 그것을 탐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내가 탐하는 그것이 나에게 기쁨을 주고 즐거움을 주고 만족을 주고 쾌락을 준다고 오해한다는 것입니다. 저것만 있으면 저것을 가지게 되면 내가 기쁘고 내가 만족하게 될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기쁨과 만족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에게 기쁨을 주고 만족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에 기쁨이 있고 만족이 있는 것입니다. 다른 그 무엇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정확히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탐심을 버리지 못하니 결국 우상을 만들고 우상을 쫓아 사는 것입니다. 탕자가 집을 나간 것도 결국은 우상을 쫓아간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 없는 세상 사람들 안에는 탐심으로 인한 우상이 다 있습니다. 없이는 못사니까요. 그들이 섬기는 우상에는 크게 두가지. 돈과 사랑입니다. 명예나 지식도 우상이 됩니다. 사람도 우상이 되고. 내가 탐하는 것이 있다면 다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탐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이것이 우상이냐? 아니냐? 라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요? 내가 그것을 버릴 수 있느냐? 없느냐? 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왜 버릴 수 없느냐? 나를 위한 것이고 내 것이라고 생각하니까요. 버리지 못하는 것. 그것이 우상입니다.
사울왕이 아말렉을 치고 난 다음 좋은 것들을 남겼을 때 사울은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사울왕은 하나님께 제사하려고 좋은 것을 남긴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기념비를 세운 것 같이 또 자기를 위해 좋은 것들을 남긴 것입니다. 이것을 정확하게 꿰뚤어 본 사무엘은 사울왕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삼상 15: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15: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가장 큰 제사라는 것입니다. 내 것이라고 생각할 때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 때 내가 사랑하는 아들까지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왜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을까요?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이 아브라함 자신만을 위한 것이 되고 자신만의 아들이 되면 그것이 우상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그를 어떻게 믿음의 조상으로 세울 수 있겠습니까? 내가 가진 것을 하나님께 드릴 수 없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세상은 어떨까요? 다 우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 탐심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먹음직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열매들을 좇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가? 탐심을 이길 수 있습니까? 십계명에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고 했는데 우리 속에 있는 이 탐심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까? 컨트롤 할 수 있습니까?
그럼 이 탐심을 우리가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딤전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했는데요. 이것의 뿌리는 사랑입니다. 어떤 사랑인가? 돈에 대한 사랑이라고.이 탐심으로 인해 미혹을 받아 믿음을 잃어버리고 자기를 찌른다고. 돈이 사랑의 대상입니까? 아니죠. 돈은 사랑하기 위해서 필요한 물질인 것입니다. 그런데 돈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딤후 3: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3: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3: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자기를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인해서 결국 돈을 사랑하게 되고 교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사랑했느냐? 지금도 무엇을 사랑하고 있느냐? 여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탐심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고 그래서 이웃의 것을 탐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해서 그에게 나의 것을 흐르게 하는 것입니다. 나눠주고 베푸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탐심과 하나님의 사랑의 차이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오면 탐심을 이길 수 있고 우상숭배의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이 어디에 있는가?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해서 당신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셨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사랑은 나의 것을 내 안에 머물게 두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게 하고 내어주는 것입니다. 독생자 예수그리스도의 이 땅에 오심의 사건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자신만의 아들로 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구원자로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다 받은 자들인 것입니다. 이 사랑을 받은 자들에게 사도는 말합니다.
4: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행전 20:3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20:34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20:35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이 말씀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기 전에 예베소 장로들에게 떠나면서 했던 말씀입니다. 교회 장로들에게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다른 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탐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면 바울 안에는 이미 충만한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에 세상 것들을 탐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이 이미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은과 금은 내가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이름. 이것이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탐심은 내 안에 충만한 것이 들어오면 사라집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말합니까?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마 10:8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받은 것이 없는데 줄 수 있습니까? 충만하게 받은 것이 있기에 주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도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십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따라 값없이 돈 없이 할수만 있다면 한 사람이라도 더 자신이 가진 것들을 나눠주고자 그렇게 평생을 살아온 것입니다. 이제 너희도 그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된 것임을 기억하고 복 받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하며 사는 것이 마땅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사도의 말씀을 따라 복 받는 삶을 사는 여러분들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