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4:9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4:10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어제에 이어서 보겠습니다. 어제는 다윗에 관한 말씀을 봤습니다. 다윗의 사악한 범죄를 가리우셔서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를 용서해주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가 가리워지고 용서함을 받은 것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죠. 어떻게 다윗이나 이 땅에 사는 우리 모두가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받은 것입니까? 우리의 모든 죄를 주님께서 친히 담당하신 십자가의 대속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내가 거부하지 않고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이것을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이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이 놀라운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놀라운 은혜가 왔지만 이것을 믿지 않고 받지 않으면 그것은 우리의 것이 되지 못하고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이 있다면 그 누구라도 이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계속 말합니다.
롬4:9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4:10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여기서는 복이라고 했습니다. 이 복을 누가 받는가? 할례자들만 받는가? 아니면 무할례자들도 받을 수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할례자는 유대인을 말하는 것이고 무할례자는 이방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안에 새겨져 있는 너무나 편협하고 독선적인 사고가 있었습니다. 할례를 받은 우리 민족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먼저 할례를 해서 유대인이 되고 난 다음에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들에게 어떻게 구원의 길이 열릴 수 있느냐고. 이런 완고한 생각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적용해 보면 우리 믿는 자들 즉 교회를 나가고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고 헌금을하는 크리스천들만이 천국에 갈 수 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겠냐? 이런 완고한 생각. 그러나 정말 그렇습니까? 앞에서 봤습니다.
롬2장에 표면적인 유대인은 유대인이 아니라고.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라고. 겉으로만 표면적으로만 신앙한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을 믿는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말 마음 가운데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사는 자들. 그런 자가 진정한 크리스천이요. 이면적인 신앙인 것이죠. 고넬료라고하는 이방인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구원을 받는 이야기가 사도행전 10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이들만의 착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7: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주의 뜻대로 살지 않고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면 오히려 그들이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크리스천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아무리 큰 권능과 기적을 일으키고 귀신을 좇아낸다 할지라도 그들은 불법을 행하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할례를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 라는 것이죠.
롬4:9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자, 아브라함이 언제 할례를 받았습니까? 그가 75세 때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믿음으로 순종하여 나아갔을 때 그는 이미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죠. 그리고 나서 99세 때 할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창 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창 17:24 아브라함이 그의 포피를 벤 때는 구십구 세였고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기 전에 이미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아서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된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롬4:9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믿었던 아브라함이 그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아니냐고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의로워지고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그런데 율법도 아브라함 이후 430년 후에 모세를 통해서 나온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고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할례 때문도 아니고 율법을 잘 지켜서 그런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20장에 포도원의 품꾼 비유가 나옵니다. 여기 보면 먼저 온 자가 있고 나중 온 자가 있습니다. 나중 온 자는 거의 일을 하지 않았는데 한 데나리온의 삯을 받으니 먼저 온 자들이 불평합니다. 나중 온 자들이 누구일까요? 이것은 주님의 제자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먼저 와서 열심히 일했던 자들 역사적으로 보면 먼저 와서 수고하고 고생한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면서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들은 일한 것이 없는데 이들이 구원함을 받고 주님의 제자가 되고 하나님의 복을 받고 은총을 받으니까요. 먼저 온 유대인들이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늘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은총은 하나님의 선물이죠. 그런데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을 유대인들이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극이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둘째인 아벨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아주신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런데 형 가인은 그것을 기쁜 마음으로 보지 못하죠. 항상 역사의 어리석음과 비극이라는 것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을 보지 못할 때 일어납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니 시기하고 질투해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것은 세상의 상식적인 관점이나 율법적인 일대일의 관점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롬3:21절부터 계속해서 설명해내려고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이 깨달아져야 하고 이것이 열려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우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주님의 의의 옷을 우리에게 입혀주셨습니다. 이것은 교환사건입니다. 우리의 죄의 옷을 주님이 입으시고 주님의 의의 옷을 우리에게 입혀주신 사건. 이것은 사실 상상할 수 없는 것이죠. 이것은 놀라운 주의 사랑과 은총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 놀라운 은혜와 은총과 사랑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유대인들 안에 있는 이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유대인들처럼 율법적인 가치 속에 살게 될 때 할례를 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율법을 지켜야만 의로워질 수 있다라는 이런 생각 속에 살아갈 때 우리의 인생은 매우 답답하고 비극적이고 절망적인 인생이 되어버립니다. 왜냐면 결국은 우리가 율법을 다 지키고 살 수 없기 때문이죠.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말할 수 없는 은총을 깨닫고 그것을 따라서 살게 되면 우리는 정말 멋진 세계를 열어낼 수 있습니다. 그런 자들안에는 넘치는 감사와 감격만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우리들이 어느순간 유대인들과 같은 이런 편협한 마음은 없는지 돌아보고 오직 주님의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이 놀라운 은총의 세계를 많은 이들에게 증거하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