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마21:28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1:29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21:30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21:31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오늘 말씀은 두 아들의 비유인데요. 창조의 기사를 보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었던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인간을 창조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지으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의 목적과 뜻은 어떤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자녀가 되고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이 정말 쉽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문제입니까? 믿음을 세우지 못하는 우리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세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관계성의 기본은 믿음입니다. 특별히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믿음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사랑도 있고 순종도 있는 것입니다.
창3장에 보면 뱀으로부터 유혹과 시험을 받는데 이 자리는 아담과 하와의 믿음을 세우는 자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아담과 하와는 믿음을 세웠습니까? 아니죠.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선악과를 따먹어 버립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후에 보면 하나님의 역사는 지독하게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만들고 세우는 역사가 진행됩니다. 이게 안되면 안되니까요. 이 관계가 가장 기본이기 때문에 이것이 안되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는데 뭘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축복을 부어주고 싶어도 서로 믿지 못하고 늘 다투고 싸운다면 하나님이 뭘 줄 수 있겠습니까? 주려다가도 주지 않고 준 것도 빼앗아가시겠죠.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 온전한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가 특히 그렇습니다. 창22장에 보면 이삭을 번제하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말씀을 잘 보면 이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세우는 이야기임과 동시에 이삭의 순종을 테스트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관계를 볼 때 아버지와 아들의 온전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다면 번제 자체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냐면 이미 이삭은 아브라함보다 힘이 더 센 나이가 되었습니다. 이삭이 마음만 먹었다면 언제든지 아브라함의 뜻에 불순종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이 아무리 믿음을 세웠다고 해도 이삭이 불순종하면 그만인 것입니다. 즉 이 시험은 아브라함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문제는 아들의 문제이고 아들의 문제는 아버지의 문제이잖아요.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풀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삭번제는 아브라함만의 시험이 아니라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의 뜻을 따라 순종할 수 있느냐?의 시험이기도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성이 온전히 세워져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아들들은 뭐 하자고 하면 잘 순종합니까? 귀찮고 재미없는 것은 절대하기 싫어합니다. 우리 아이들도 그러합니다. 이것을 바꿔낼 수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바꿔낼 수 있을까요? 이삭은 어떠했을까요? 이삭은 놀랍게도 아버지 아브라함의 뜻에 순종합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믿음의 관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모리아 산으로 따라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아들로서 아버지 아브라함을 끝까지 믿었고 순종한 것입니다. 우리 말대로 하면 철이 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도 그렇고 이삭도 복을 받고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복은 아들 이삭이라는 관계성과 연결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아들과의 관계성을 잘 만들어내지 못하면 복을 받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이삭은 훌륭히 이루어 낸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그리스도의 훌륭한 예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그냥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이런 믿음의 길을 따라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온전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이루어 주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도 이제 주님과 같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도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왜냐면 주께서 다 보여주셨고 가르쳐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보이신 진정한 아들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오늘은 이것에 관한 말씀을 통해 함께 보려고 합니다.
마21:28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이 말씀은 23절 보면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두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었는데 먼저 맏아들에게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라고 했습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 장로들이 곧 맏아들된 자리에 있는 것이니 이것은 이들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포도원은 무엇입니까? 포도원은 천국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세상의 일과는 구별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는 일은 천국을 만드는 일인 것입니다. 천국은 누가 만들어가는가? 아들들,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만들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맏아들에게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 5: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아들은 홀로 일하거나 따로 일하지 않고 아버지와 늘 함께 하는 것입니다. 동행하는 것입니다. 창6장을 보면 노아를 당대 의인이라고 성경은 소개하고 있는데 노아가 의인인 이유가 뭐가 있을까요? 롬3장에 보면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할 육체가 없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노아가 어떤 율법적인 행위를 가지고 의인이 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었을까요?
창6: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즉 은혜로 말미암아 의인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의인이 된 자들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동행은 사실 아버지보다 아들에게 필요한 것이고 하나님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와 동행하면서 아버지가 하는 일을 보고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5:19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들은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것을 보고 일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항상 먼저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보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라고 하시기 전에 아버지는 이미 먼저 포도원에서 일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신앙의 길을 하나님이 항상 먼저 우리 앞서서 일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기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어떠했습니까?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 뭘하고 있었을까요? 자기 일 하고 있었겠지요. 아이들은 어떻습니까? 부모가 뭘 하든지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 놀기 바쁩니다. 그러다가 철이 들면 이제 부모의 일에 관심이 생기게 됩니다. 아버지는 무슨 일을 하시나? 어머니는 뭘 하시나? 관심이 생기면 이제는 철이 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로서 하나님께관심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모의 관심은 어디에 있을까요? 모든 것이 다 자녀에게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모든 관심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라고 했는데 이 포도원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을 때 그 방주는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창6:14절에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방주는 노아를 위한 것이고 노아의 가족을 위한 것이듯이 하나님 나라 즉 천국 건설은 그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기를 바랍니다. 그러니 누가 일해야 하겠습니까? 포도원에서 살아갈 자들이 일해야 건성으로 하지 아니하고 주인의 마음을 가지고 정성을 다해서 열심히 잘 만들어가지 않겠습니까?
본문을 보면 맏아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21:29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가겠다고 했지만 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누구의 모습일까요? 가겠다고 했다가 가지 않고 오겠다고 했다가 오지 않고 하겠다고 했다가 하지 않는 자들 이런 맏아들 같은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게 유대 지도자들의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맏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집안은 어떻게 되겠나? 그럼 처음부터 안 가겠다고 하지 못하겠다고 하지 않고 왜 가겠다고 했을까요? 여러가지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지만 우리는 이렇게 봅니다. 이들이 가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해야 하는 줄은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겠다고 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진짜 들어가서 일하려고 마음을 먹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상황이 안되니까요. 가려 했지만 여러가지 핑계와 변명으로 가지 않은 것입니다. 연약함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누구의 모습입니까? 우리 안에는 없습니까?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뿐 아니라 모든 제자들도 주님의 죽음에까지 다 따라가겠다고 결단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의 상황 앞에서 다 무너진 것입니다. 상황이라는 장애물이 항상 믿는 우리들을 막습니다. 이런 상황을 넘어서지 못하면 결코 갈 수 없게 됩니다. 사탄마귀가 우리의 약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거든요. 그래서 내가 약한 부분, 내가 뭐에 약한지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그런 상황을 만들어서 못 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뭡니까? 사탄 마귀는 결코 우리의 생명에는 손을 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갈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생명만큼은 하나님께서 지키십니다.
욥의 시험을 아시죠. 사탄이 욥을 참소해서 그의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시험해보겠다고 합니다. 마귀가 두번을 시험하는데 처음에는 소유입니다.
욥 1:11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소유를 다 빼앗가면 하나님을 욕할거라고. 그러자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욥1:12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사탄이 욥의 모든 소유를 다 빼앗아 갔는데도 욥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으니까요. 이제는 욥의 뼈와 살을 치면 그가 배반할거라고 합니다. 사탄이 우리의 몸을 치고 병을 줄 수는 있어도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이 결코 양보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지키십니다.
욥2:5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2:6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이 땅의 그 어떤 세력이 우리를 죽음으로 위협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생명에는 결코 손을 못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눈동자처럼 지키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있으면 어떤 상황을 이기고 넘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들이 가져야 할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지 못한 첫째 아들은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둘째 아들에게 가서 말합니다.
21:30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둘째 아들은 처음에는 싫다고 했지만 후에 뉘우치고 들어갔습니다. 왜 싫다고 했을까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냥 싫을수도 있고 상황이 안되니까 그럴수도 있고 등등. 그런데 나중에 뉘우치고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다른 성경을 보면 간다 했지만 가지 않은 맏아들과 싫다고 했다가 들어간 둘째 아들이 바뀌어져 있습니다. 사본이 다르다고 하는데요. 어찌됐건간에 중요한 것은 뭔가? 첫째 아들이 중요한가 둘째 아들이 중요한가가 아니고 들어간 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아들이 되어야 할까요? 가겠다고 응답하고 마음이 바뀌지 않고 끝까지 실천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베스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베스트는 못되더라도 처음에는 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나중에라도 뉘우치고 들어가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예수님은 처음과 끝이 동일하신 분이셨습니다.
21:31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대부분은 자기의 뜻대로 살아갑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것처럼 보여도 이면적으로 보면 자기 뜻대로, 자기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들이 먼저이고 이들이 맏이고 첫째라 할지라도 들어가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진짜 아들이라 말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비록 세리들과 창녀들과 같은 죄인이라도 할지라도 이들이 하나님을 믿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자들이라면 그들이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먼저 된 자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뜻대로 하는 자들이 곧 이면적인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만들어가야 하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관계이고 사랑의 관계이고 순종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가 그냥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관계라도 그것을 만들어가려면 노력이 필요합니다.
부부관계도 그렇습니다. 그냥 저절로 서로를 믿고 사랑할 수 있는 그런 관계가 되지 않습니다. 그냥 내버려두면 어떻게 될까요? 사랑은 식어지고 무관심해지고 서로에 대한 요구만 높아지며 불평과 불만만 쌓이게 됩니다. 결국 관계성은 메마르고 황폐해 버립니다. 밭을 관리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잡초만 무성한 풀밭이 되든지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는 황폐한 땅이 되든지. 둘 중에 하나가 아닙니까? 땀 흘리며 열심히 돌을 골라내고 거름을 주고 밭을 일궈내야 좋은 밭이 되고 기름진 밭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아버지의 아들의 관계와 같은 믿음의 관계, 사랑의 관계를 만들내지 못하면 우리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성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도 아버지가 하는 것을 보고 배워서 한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우리도 예수님을 잘 보고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됩니다. 세상은 보고 배울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우리도 예수님을 보지 않고 예수님을 모르고 예수님을 배우지 않는다면 믿지 않는 자와 다를게 없지 않겠습니까?
주께서 이 땅에 오셔서 목숨을 다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주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에 서게 되었으니 먼저는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함으로 온전한 아들이 되고 자녀가 되기 원하고 또 이미 허락하신 우리의 관계성들을 잘 지켜 가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