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al Church

창4: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어제에 이어서 보겠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후에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묻자 가인은 아벨을 죽여 놓고도 너무나 뻔뻔스럽게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냐고 왜 내게 묻느냐?고 나는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4:10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4: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4:12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땅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저주인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창3장에 보면 아담이 죄를 짓고 난 이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창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아담의 죄로 인해서 땅이 저주를 받게 되었는데 이제 아담의 아들인 가인이 또 죄를 짓자 이제는 땅의 저주를 받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담으로 인해서 땅이 받았던 저주를 결국은 아들이 다시 받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죄를 지으면 그 죄가 자신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죄로 인해서 죄 없는 땅이 저주를 받게 되고 또 내가 죄를 지으면 다른 이의 저주를 내가 받게 되는 것입니다. 

롬5장에서는 아담 한 사람의 죄로 인해서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다 죄를 짓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아담이라는 땅이 저주를 받으니 그 땅 위에서 사는 모든 자들이 다 저주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가인은 이 저주를 풀어낼 너무나 귀한 사람이었지만 이 저주를 풀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아담의 저주를 이어가는 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아벨의 죽음을 생각해보면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시기질투입니다. 자, 아담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마음 즉 교만의 마음으로 죄를 지었고 가인은 동생 아벨이 자신보다 더 높아지니 그것을 참지 못하고 죄를 지은 것입니다. 

왜 우리가 교만 즉 높아지려 하면 안되나? 높아지는 자를 배아파하는 자가 있고 시기질투하는 자가 있어서 이들의 죄로 인해 결국 죽임을 당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높아지는 것, 많이 가지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못한 자들의 시기질투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일까요? 많이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들과의 대립이 아닙니까? 

그렇다고 높아지지 말고 많이 가지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의 말씀대로 주님께서 보여주신 삶의 길을 따라 가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주시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더하여 주셔서 풍성케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신 길이 무엇입니까? 낮아짐으로 높아지고 섬김으로 섬김을 받고 비우심으로 채워지며 죽음으로 다시 사신 부활의 삶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가인 안에 있었던 시기질투의 죄 – 이것이 우리 안에도 동일하게 있는 것인데 이 죄를 어떻게 사로잡을 것인가? 이 죄를 사로잡지 못해 결국 가인은 지키고 보호해야 할 즉 사랑해야 할 동생을 죽이는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 밀려오는 시기질투의 죄는 어떻게 이길 수 있는가? 교만이 수직적인 관계에서 오는 죄라면 시기질투의 죄는 수평적인 관계 즉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죄입니다. 다시 말하면 함께 살게 되면 반드시 이러한 죄가 생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죄를 이기자면 우리가 한 몸을 이루고 하나가 되면 이길 수 있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하나를 이루지 못하면 이 시기질투의 죄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알게 되는 세계는 우리가 몸은 다르지만 한 몸으로 하나로 지어졌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왜 아담의 죄가 나의 죄가 되는가? 이것은 아담과 내가 남남이 아니고 긴밀하게 마치 한 몸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마치 거대한 한 몸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왜 기쁨이 없는가? 다른 사람들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면서 자신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기쁨이 얼마나 될까요? 진정한 기쁨은 사랑하는 자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내가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의 기쁨이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기쁨을 얻기 위해서는 그와 내가 한 몸이라는 것을 알고 하나를 이루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가인은 이것을 몰랐기에 아벨을 보고 시기질투하며 살인이라는 끔찍한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창2장에 한 몸을 이루라 하신 말씀을 따라 또 하나를 이루라 하신 주님의 고별기도를 따라 우리가 살지 못하면 우리의 끝은 이렇게 끔찍한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으로 맺어진 부부이지만 결혼했다고 해서 이들이 한 몸을 이루고 하나가 된 것은 아닙니다. 진정으로 하나가 되지 못하면 결국은 갈라지고 나뉘어지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하나를 이루고 살았나? 이것이 신앙의 길을 가는 우리들이 놓쳐서는 안되는 자신에게 던지는 신앙의 지표가 되는 질문입니다. 

 

오늘 이 말씀 기억하면서 우리가 가야 할 신앙의 길을 묵상해보고 점검해보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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