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al Church

어제에 이어서 창22장을 보겠습니다. 4절까지 봤는데 우리의 신앙의 여정 가운데 아브라함의 3일길과 같은 그런 기간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기간은 그 어떤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갈 수 없고 오직 믿음으로만 갈 수 있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너무나 외롭고 고통스러운 길이 될 수 있지만 이 삼일을 승리하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는 세계가 있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삼일을 지나 이제 모리아산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5절부터 보겠습니다. 

창22: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새벽에 두명의 종과 이삭을 데리고 함께 길을 떠났습니다. 이제 모리아산에 도착해서는 두명의 종들에게는 여기서 기다리라고 말하며 오직 아들 이삭과 아브라함만이 산을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아버지와 아들만이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종은 더 이상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아버지와 아들만이 갈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종과 같이 신앙하는 자들은 더 이상 갈 수 없는 때가 옵니다. 

종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자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시키는 것만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아들은 다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상속자이기 때문에 주인입니다. 주인의 마음을 가지고 또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뜻을 알아 스스로 행할 수 있는 자가 바로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진정한 아들이셨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아시고 스스로 아들의 길을 가셨다는 것입니다. 겟세마네의 기도를 보면 주님은 십자가의 길을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지만 결국은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알고 따라가는 자가 아들입니다. 그것이 설령 십자가의 죽음의 길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아들이신 예수님 안에는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께서 나에게 해가 되는 일을 시키겠느냐?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잡으로 온 자들을 향해서 베드로가 칼을 들어 주님을 보호하니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18:11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이라도 내가 왜 거부하겠느냐?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십자가의 비참한 죽음의 길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전부가 아니고 그것이 끝이 아니라 부활이 있다는 것을 주님은 믿음으로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나를 십자가의 죽음에 머물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죽음에서 나를 건지셔서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하실 분이라는 이 믿음이 아들 예수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진 자가 진정한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 앞에 진정한 아들의 신앙을 하는 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아들이 되지 못하면 더 이상 따라갈 수 없는 때가 옵니다. 롬8장에보면 우리는 원래 하나님의 원수된 자들이었는데 우리를 양자로 삼아주셨다고 했습니다. 로마법을 보면 양자가 되면 양자는 친자와 똑 같은 자격과 대우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양자가 되었나? 그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값을 치르고 우리를 죄로부터 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아들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도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이제 우리의 삶도 아들의 삶으로, 자녀의 삶으로 달라지고 바뀌어져야 합니다. 자녀인데 여전히 종처럼 살고 있다면 그것은 자녀입니까? 종입니까? 내가 구원을 받았는데 구원받지 못한 자처럼 살면 그것은 구원을 받은 것입니까? 구원을 받지 못한 것입니까? 구원을 받았지만 구원받지 못한 자처럼 살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 임한 구원이 아무런 능력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녀라면 자녀의 권세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드러내고 살아야 하는 것인데 그것을 드러내지 못하고 살면 괴리감이 생기고 삶의 이질감이 생겨서 삶의 혼돈이 오는 것입니다. 자녀라고 하는데 종처럼 살고 있으니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데 구원받지 못한 자처럼 살고 있으니 혼돈이 생기고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도 저도 아닌 모습이 되고 세상 속에 사는 것도 아니고 주님 안에 사는 것도 아닌 애매한 모습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계시록에 보면 차갑든지 더웁든지 하라고 했습니다. 차가운것도 아니고 뜨거운 것도 아닌 미지근한 모습. 우리가 이런 모습이 되면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가 되었기에 자녀된 모습으로 아들의 신앙으로 바뀌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 아들의 신앙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밝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보이신 아들의 모습은 무엇인가?

롬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자녀이면 자녀의 영광을 받을 수 있지만 또 고난도 함께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고난은 영광을 받기 위한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영광을 받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들의 모습이고 자녀의 모습인 것입니다. 

왜 종에서 아들이 되지 못하나? 그것은 눈 앞에 있는 고난 때문입니다. 이것을 넘어설 수 있으려면 부활의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주님의 수제자라 할지라도 주님을 세번이나 부인하고 도망하는 신앙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놀라운 믿음의 사람들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부활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창22: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예배하고 돌아오겠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배는 아버지와 아들만이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과 같은 모습으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원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하기에 우리는 아들의 신앙을 가진 자들이 되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수 있는 삶의 예배를 드릴 수 있어야겠습니다. 

예배는 보고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참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약의 예배는 구약에서는 제사였는데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제물입니다. 누가 제물이 될 것인가? 주님이 우리를 위해 친히 희생의 제물이 되어주신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제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제물인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우리 스스로 직접 제물이 하나님께 드려지게 하는 예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고 나면 나는 죽어서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주님으로만 가득 채워져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내가 살아 있으면 안됩니다. 끔찍한 것입니다.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우리를 받으시고 우리를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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