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al Church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8:22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8:23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8:24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8: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주님께서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 한 사람의 눈을 치유해주시는 기적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우리의 육적인 눈을 뜨게 해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해주는 말씀입니다.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살리는 것은 영에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영이라는 말씀입니다. 보이는 육적인 눈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눈이 닫혀져 있는가? 열려 있는가? 에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눈의 역할은 진리를 보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볼 수 없다면 우리는 영적으로 다 소경이고 맹인들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곧 진리에 눈 뜨지 못하는 자들이 주님을 만나 눈을 뜨게 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가? 진리에 눈뜬 자들인가? 그렇지 못하다면 이 말씀이 나의 말씀인 것입니다. 잘 들으면 눈을 뜰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에 눈 뜨고자 할 때 이를 방해하고 눈뜨지 못하게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먼저 이 마음이 청산되어야 하는데

9: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9: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9: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바리새인들 안에 있었던 이 마음 - 나는 눈 떴다는 마음, 나는 이미 안다는 마음. 이 마음이 있으면 진리가 가리워지게 되어 여전히 죄 아래서 죄인인 상태에 머물게 되고 결국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라는 것이 뭔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진리는 객관적이고 우주적인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곧 진리라고 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인데 우리가 그것을 모르니 예수께서 육신의 몸으로 오셔서 삶으로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내 보여주신 것입니다. 비우면 채워지고 낮아지면 높아지고 섬기는 자가 주인이 되고 죽으면 다시 사는 이 역설의 진리를 온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 삶을 통해 진리가 무엇인지를 보게는 되지만 그렇다고 진리를 온전히 안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리 많이 들어도 듣는 것만으로 온전히 깨달을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들어서 아는 것이 반이고 그것을 삶으로 드러내고 표현할 때 나머지 반이 깨달아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삶을 따라 얼만큼 가느냐에 따라 진리를 아는 수준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삶을 따라가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 말씀을 봅시다.

8:22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맹인 한 사람을 고쳐달라고 주님 앞에 데리고 나온 것입니다. 데리고 온 자들 안에 주님의 손 만 대면 나으리라는 훌륭한 믿음이 있습니다. 이 믿음 있을 때 우리가 주님 앞에 데리고 나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8:23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주님이 제일 먼저 하신 일은 맹인의 손을 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왜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신 것일까요? 마을 안에서는 안되는 것일까요? 마을은 어떤 곳인가요? 마을은 사람들도 많고 건물도 많습니다. 즉 보이는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보이는게 많으면 생각이 많을 수 밖에 없습니다. 기도할 때 왜 눈을 감습니까? 보이는 것을 차단함으로써 다른 생각이 들어오지 않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생각하고 오직 자신의 기도에만 집중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진리를 발견하기 어려운 상황과 그런 환경 즉 주님을 보기 어려운 그런 환경 가운데 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보이는 많은 것들이 있고 화려한 유혹들이 주변에 많고 또 할 일이 많고 또 우리의 개인적인 욕심이 많고 그러니 마음이 부산하고 집중을 못하고 그러니 진짜 중요한 진리를 못 보는 것입니다. 가리워진다는 것입니다세상을 보면 세상에는 하나님을 가리고 예수를 가리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수많은 지식과 많은 사람들로 인해서 하나님이 안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곳에서는 하나님을 주님을 온전히 만날 수 없고 온전히 알 수 없는 것입니다. , 우리는 누구나 다 자신이 속해 있는 마을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지식의 마을이 있고 내가 가진 경험의 마을이 있고 나의 생각과 가치관의 마을이 있습니다. 그 마을 안에서 나와야 합니다. 주님은 그 맹인을 데리고 나오셨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는 오직 주님만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나가야 합니다.  

19장에 보면 삭개오에게 주님이 찾아오셔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뭔가요?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삭개오가 가진 지식과 경험과 생각과 가치관의 모든 것들에서 내려와서 오직 주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일대일로 만나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 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를 볼 수 있는 첫번째 길입니다. 마을 밖으로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눈에 침을 뱉으시며 입니다. 왜 눈에 침을 뱉으십니까? 9장을 보면 날때부터 눈먼 사람이 나오는데 주님이 이 사람을 고쳐주실 때에도 침을 뱉어서 진흙으로 반죽하셔서 눈에 발라주셨습니다. 진흙체험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갯벌에서 하는 머드체험이 아니고 가장 힘들고 괴로운 밑바닥 체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진흙 묻혀가며 그렇게 고생하며 사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자들의 고생은 단지 고생일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하는 고생은 고생이 고생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고생이 전부가 아닙니다

 

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5: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환난이 환난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인내하게 하고 연단시켜서 마침내 우리에게 소망을 이루어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침은 사실 더러운 것이 아니지만 침을 뱉으면 더럽고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것이라고 여깁니다

50: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침 뱉음이라는 것은 말할 수 없는 모욕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 고문 받으시면서 이런 모욕을 받으셨습니다

26:67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27:27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7: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7:29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27: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죄 없으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할 수 없는 모욕과 수치와 모독을 받으신 이유가 뭡니까? 죄인된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우리가 받아야 할 모욕과 수치를 멸시를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말할 수 없는 아픔과 고통과 그 희생이 바로 우리를 향한 사랑임을 알라고 침을 뱉으셔서 발라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자리에 서게 하시는 것입니다. 1129절 나의 멍에를 매고 나에게 배우라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십자가라는 것은 사실 주님의 것과 비교가 안되는 너무나 작은 십자가이지만 이것을 통해서 주님의 크고 무거운 십자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백신을 맞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주 적은 양의 항원을 넣어 몸속에서 항체를 만들어 내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마치 그런 것입니다.

 

주께서 받으신 그 수치와 모욕과 생살이 찢겨지는 그 말할 수 없는 그 아픔과 고통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이 십자가를 모르고 어떻게 우리가 주님을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시는 고난이라는 것은 주님의 그 크신 사랑을 알 수 있게 하는 너무나 귀한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은 눈에 침을 뱉으시고 그에게 안수하셨습니다. 안수라는 것은 머리에 손을 올리는 것인데 레위기에 보면 속죄제물에게 안수를 함으로써 사람들의 죄를 전가시킵니다. 지금 주님은 맹인에게 안수하심으로 주님은 이 맹인의 모든 죄를 가져 가시고 주님의 의를 전가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고후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은혜가 이 맹인에게 내린 것입니다. 그리고 물으셨습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8:24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안수 한번으로 진리를 보게 된 자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자도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거의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13장에 보면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신 주님을 요한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왜 끝까지 사랑하실 수 밖에 없었을까요? 그래야만 바뀌고 변화되니까요. 한번의 사랑으로 안되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한번 사랑했다고 한번 말씀들었다고 바뀝니까?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돌아서면 까먹는 그런 모습이 우리가 아닌가? 그러니 또 가르쳐주시고 또 사랑하시고 또 용서하면서 끝까지 그가 변화될 때까지 그렇게 가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일흔번씩 일곱번이라고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끝까지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한 번 들었을 때 다 알지 못했다면 다시 들으면 되는 것입니다. 다시한번 말씀의 안수를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며 함께 하시는 성령께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게 하시고 우리를 종국에는 영화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8: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이것이 주님의 역사입니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변화되게 되어 있고 열매 맺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이 말씀 기억하면서 진리의 눈 떠 하나님의 큰 영광을 드러내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주님, 우리 안에 온전히 눈 뜨지 못한 모습이 있다면 주님의 그 사랑의 십자가를 보게 하시고 주님의 말씀으로 주님의 우리를 향한 그 사랑의 손길로 우리의 닫힌 눈과 귀를 열어 주의 음성을 듣고 진리이신 주님을 밝히 볼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되게 하여주옵소서.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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