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al Church

 

15: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15: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15: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15: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15: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15: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15: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15: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탕자의 이야기입니다. 앞부분에는 탕자가 왜 아버지 집을 떠나게 되었고 어떻게 그가 다시 돌아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다시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여 아버지가 잔치를 베풀어주며 너무나 기뻐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고 오늘 본문은 이제 큰 아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잘 보면 우리 안에 있는 관계성에서 오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5: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15: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15: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15: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맏아들은 지금까지 밭에서 일하다가 집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열심히 일을 했는지 안했는 지는 알 수 없지만 여하튼 큰 아들은 자기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잘 지켜왔던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훌륭합니다. 겉으로 보면 그는 너무나 모범적인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마치 자기 공로를 가지고 있는 바리새인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첫째가 왜 화가 난 것입니까?

15: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15: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큰 벌을 받아 마땅한 동생에게는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열어주시고 자기에게는 염소 새끼 한마리도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찌 이렇게 자신을 대할 수 있느냐? 라는 것입니다. 첫째 안에 너무나 그럴듯한 자기 정당성이 있습니다. 이런 첫째의 모습을 한 마디로 하면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율법적이다라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동생에게는 벌을 주어야 하고 자기 할 일을 잘 한 자기에게는 상을 주어야 맞는 것인데 이게 반대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알았다 할지라도 어느 순간 가다보면 율법적으로 바뀌어져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다 은혜로 복음으로 구원을 받아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사랑해야 할 형제 자매에게 복음적으로 대하지 못하고 엄한 율법으로만 대하려고 하는가?

그러면서 왜 나에게는 아무것도 주지를 않느냐?는 것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첫째에게는 아버지가 염소 새끼 한마리도 주지 않았던 것일까요?

여러분, 우리가 신앙의 길을 갈 때 이런 경험 해 본적 없나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할 만큼 다 했는데 다른 사람에게만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나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 것 같은 생각. 그래서 나는 받은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첫째의 이 마음이 어디에서 부터 에서 왔을까요?  

4장에 보면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둘이 각각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데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만을 받아주셨습니다. 이것은 아벨의 삶을 받아주시고 인정해주셨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가인은 그렇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가인이 뭘 잘못했길래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만 받아주시나? 가인안에는 어떤 마음이 있었을까요? 그래도 내가 형인데, 내가 할만큼 했는데 왜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홀대 하시나? 그러면서 가인안에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동생에 대한 미움으로 안색이 변하니까요.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4: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이런 경험 없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런 가인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가인아, 네가 왜 분노하느냐? 왜 화가 났느냐? 화 낼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화 낼이 있고 화를 내서는 안되는 일이 있습니다. 공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화를 낼 때는 화를 내야죠. 분노할 때는 분노해야 합니다. 2장에 보면 성전을 장사치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을 때 주님은 분노하시며 장사하는 자들의 상을 뒤집어 엎으시고 쫓아내시고 돈을 쏟아버리셨습니다. 이것은 거룩한 분노입니다. 불의를 대한 공분. 이것은 당연히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화를 낼 때는 안내고 화를 낼 일이 아닌데 화를 내는 그런 모습이 우리 안에는 없습니까?

지금 가인이 화를 낼 일입니까? 아니죠. 오히려 아벨의 제사라도 받아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함께 기뻐해야 될 일이 아닙니까? 함께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일인지 화내고 원망하고 불평해야 하는지를 분별하지 못하는 병자와 같은 모습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가인에게 왜 분노하냐고. 왜 화를 내느냐? . 이것은 화낼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이 말씀을 쉬운 성경으로 보면

[쉬운성경]

4:7 네가 좋은 마음을 품고 있다면 어찌 얼굴을 들지 못하겠느냐? 네가 좋은 마음을 품지 않으면 죄가 너를 지배하려 할 것이다. 죄는 너를 다스리고 싶어하지만,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

가인이 얼굴을 들지 못하는 것은 가인 안에 있는 분노와 미움 때문입니다. 죄적인 마음이 들어온 것을 아시고 하나님께서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공분이 아닌 까닭 없는 분노와 미움. 이로 인해 말할 수 없는 죄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가인이 화를 내고 분노한 것은 자기 안에 자신을 잘 했다 라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의 첫째 아들 안에도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고 오히려 열심을 다해 자기 자리를 잘 지키면서 할만큼 했다라는 자기 행위와 공로 즉 자기 의로 가득 찬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없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시나? 라는 마음. 하나님께서 아무 이유없이 까닭없이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겠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밖에 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사정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신앙의 길을 가다보면 머리로 이성적으로 객관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일들이 생깁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나? 끝까지 믿고 흔들리면 안됩니다. 내가 이해가 안된다고 분노하고 화내고 원망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는 우리보다 더 크고 깊으신 하나님의 뜻이 있고 계획이 있다는 것을 믿고 참고 인내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생각지 못한 고난과 시련이 왔을 때 함부로 생각하고 인간적으로만 생각하면 실수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잘 이해하면 좋겠지만 우리는 약하고 부족한 인간인지라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헤아리지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이해가 안되고 납득이 안된다고 해서 하나님이 잘못한 것입니까? 그렇지 안잖아요.

나름 신앙 생활 열심히 했고 헌신도 하면서 고생하면서 말씀 붙들고 온 자들 안에 자기 생각대로 자신이 원하는데로 되지 않고 이해되지 않았을 때 본문의 첫째 아들과 같은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서운한 마음일 수도 있고 불평과 원망의 마음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아들에게 아버지가 말씀해주십니다.

15: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첫째가 서운하고 원망했던 이유는 내가 원하는 만큼 받지 못하고 얻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아들에게 아버지는 내 것이 다 네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아버지의 것은 아들의 것이 맞잖아요. 결국 모든 것을 아들이 다 물려 받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상속자라는 것입니다. 누가 아버지의 것을 물려 받게 되는가? 아버지와 함께 있는 자 그가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18장에 뒷 부분을 보면 용서에 관한 말씀을 주님이 해주셨는데요. 거기 보면 일만달란트 빚진 자가 주인의 자비로 모든 빚을 탕감 받고 자유함을 얻었지만 자신에게 빚진 동료의 빚을 탕감해주지 못해 결국 다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해주었습니다.

왜 이 사람은 일만달란트라는 엄청난 빚을 탕감 받고도 자신에게 빚진 백 데나리온의 빚을 탕감해주지 못했을까요? 다시 말하면 자신의 엄청난 죄를 용서받은 자가 자기에게 지은 작은 죄를 용서해주지 못하나? 사랑을 받았다면 사랑을 주어야 하고 복을 받았다면 복을 나눠주어야 하고 용서를 받았다면 용서를 해주어야 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 아닙니까?

요일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받게 되면 사랑을 주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사랑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고 용서를 하지 못하는 것은 용서를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왜 용서를 못하나? 용서가 안되나? 자신이 용서를 받았으나 자신이 받은 용서를 다 잊어버렸든지 자신은 용서를 받았지만 여전히 용서를 받지 못했다고 생각할 때 자신은 용서를 받은 일이 없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용서가 안되고 율법적으로만 대하는 것입니다.

일만달란트를 탕감 받았으나 탕감 받은 것을 다 잊어버렸다든지 혹은 탕감 받았는데 탕감 받지 못한 자처럼 살았다든지 어느편이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많은 은혜를 받았어도 관리를 못하면 한 순간에 다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자신은 아무것도 받지 못한 자처럼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늘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신 것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살면서 항상 좋은 일만 있을 수도 없지만 또 항상 나쁜 일만 있을 수도 없는 것이 아닙니까? 다 양면이 있는 것이죠.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고 음지가 있으면 양지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어두운 부분이 있으면 밝은 부분이 있고 부정적인 부분이 있으면 긍정적인 부분이 있고 단점이 있으면 장점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십자가가 있으면 부활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좋은 것을 다 잊어버리고 은혜는 다 쏟아버리고 그러면 뭐만 남습니까? 나쁜 기억, 힘들고 고생스러웠던 것만 남고 십자가만 있는 것처럼 보이죠.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죠. 힘든 가운데 은혜가 있고 고생 가운데 보람이 있고 어려움 가운데 사랑이 있고 기쁨이 있지 않는가? 분명 십자가 너머에 부활이 있는 것인데 왜 부활은 보지 못하나?

첫째 아들의 불평이 무엇입니까? 나에게는 염소 새끼라도 준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나에게는 작은 행복이라도 없고 기쁨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진정한 행복과 기쁨이 뭘까요? 뭘 하면 뭐가 있으면 행복하고 기쁘게 살 수 있을까요? 가진 것이 많고 몸도 편하고 원하는 것 다 할 수 있고 그러면 행복할까요? 기쁘게 살 수 있을까요?

진정한 기쁨과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가진 것이 부족해도 사랑하는 사람과 평화를 누리며 함께 살아 있을 때 기쁘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까?

아버지 집에서 사랑하는 아버지와 함께 자기에게 주어진 일이 감당하면서 성실히 살 수 있다면 이것만큼 기쁘고 행복한 것이 어디 있을까요?

모세를 보세요. 애굽의 왕자로서 평생을 육신의 편안함과 넉넉함과 풍요로움으로 원하는 것은 다 누리며 살 수 있는 자였으나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고난의 길을 택했습니다. 왜 이런 고생의 삶을 선택한 것인가?

84:10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84:11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아무리 화려한 세상 속에서 많은 것들을 누리며 살아간다 한들 그렇게 천 날을 살아갈지라도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주님과 함께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진정한 만족과 기쁨은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와 영화를 주시고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시는 하나님이시라고.

아버지 집에서 지금까지 누려왔고 지금도 누리고 있고 또 앞으로도 영원히 누리게 될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은혜와 영화의 세계를 왜 못 보고 있는가?

내 것이 다 너의 것이라고. 아버지 안에는 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늘 우리는 나의 것을 생각합니다. 소유의 문제가 있습니다. 어떻게 소유로부터 자유해질 수 있는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마음. 또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셨다라는 마음. 그리고 더 나아가 그 모든 것은 없어도 된다는 마음. 오직 하나님만 있으면 족하다는 마음. 이 마음이 있을 때 우리는 소유로부터 자유해질 수 있고 진정으로 하나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될 때만이 우리가 함께 기뻐할 수 있습니다.

15: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아버지 안에는 잃어버린 둘째 아들을 다시 찾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이 기쁨이 큰 아들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극입니다. 살전5장에 보면 항상 기뻐하라고 했는데 어떻게 우리가 항상 기뻐할 수 있을까? 내가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쁨이 얼마나 될까요? 1365일 중에 나로 말미암은 기쁨이 며칠이나 될까? 거의 없지 않습니까?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는가? 항상 기뻐하시는 자의 기쁨이 있으니 그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될 수만 있다면 나도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요?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연합을 하는 것입니다. 분리되고 나눠지고 떼어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미움이 생기면 보기도 싫잖아요. 멀어집니다. 우리 안에 미움이 사라지고 오해가 사라지고 죄가 사라지면 하나가 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신앙하는 것이 아닙니까?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 내 것이 너의 것이 되어도 결코 아깝지 않고 오히려 더 기쁜 세계.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도 이 마음 가지고 사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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