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10: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10: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0: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10: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10: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10: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10: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바디매오라는 참으로 불쌍한 한 사람이 주님을 만나 구원을 받는 이야기입니다. 바디매오는 어떤 사람이냐면 맹인 거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앞도 못 보는데 가진 것도 없는 거지였습니다. 이것만큼 비참한 상황이 또 있을까요?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 사람에게도 무슨 소망이 있을까요? 여러분들은 어떤 소망을 가지고 살고 있나요? 사람에게는 사랑도 필요하고 믿음도 필요하지만 또 하나 정말 필요한 것이 소망입니다. 사랑이 우리를 하나되게 하고 믿음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라면 소망은 우리가 살아갈 이유를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자살율 1위라고 하는데 왜 사람이 귀한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것일까요? 소망이 사라지면 다시 말해 살아갈 이유가 없어지면 더 살고 싶은 마음도 사라집니다. 우리는 항상 어떤 경우에라도 소망을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바디매오라는 이 사람은 좀처럼 소망을 가지기가 어려운 사람이었었습니다. 겉으로 볼 때도 앞을 못 보는 맹인인데다가 또 가진 것도 없는 거지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런 상황에 있다면 소망을 가지고 살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비참하고 불쌍한 상황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소망을 잃어버릴 수 없는 이유가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자, 그 이유가 무엇인지 본문을 통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막10: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10: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라는 맹인 거지가 길 가에 앉아있었습니다. 앉아서 무엇을 했을까요? 앞이 보이지도 못하니 일을 할수도 없고 그렇다고 가진 것이 없으니 먹고 살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이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구걸하는 것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 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몇푼이라도 주면 그것으로 먹고 살아야 하는 인생. 그래서 구걸하기 위해 앉아있었던 것인지 모릅니다. 행전3장에 보면 날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매어다가 미문이라는 불리우는 성전 문 앞에 두었습니다. 이 사람은 사람들이 제물을 사고 난 돈을 구걸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이 바디매오도 이런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자신의 삶을 스스로 바꾸어낼 수 있는 어떤 힘과 능력도 없습니다. 그냥 평생 이렇게 살수 밖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내 상황과 내 환경을 따라 평생 이렇게 똑같이 살아야 한다고 한다면 어떨 것 같으신가요?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이 모습 이대로 평생을 똑같이 살아야 한다고 한다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요?
내 삶에 만족이 있고 감사와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다 할지라도 사람은 똑 같은 상황에 똑 같은 일을 반복해서 하게 되면 실증을 느끼게 됩니다. 하물며 내가 원하지도 않는 일을 반복적으로 한다면 이것은 말그대로 지옥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런 상황을 변화시켜낼 수 있는 힘과 없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바디매오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는 소리가 들린 것입니다. 이 맹인 거지는 이 소리를 듣고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쳤습니다.
이 사람이 주님을 어떻게 알았겠어요? 소문으로 귀 동냥으로 들어서 알았겠지요. 예수가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가 살리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소문을 듣지 못했다면 어떻게 예수를 만날 수 있었겠어요?
여러분, 예수를 만나서 구원을 받은 우리들이 할 일은 예수님의 소문을 퍼트리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로서는 그 어떤 변화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로또에 당첨될 확률이 매우 적다는 것을 알면서도 매주 기대를 가지고 로또를 하는지 아십니까? 지금 상황에서 자기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어떤 변화도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로또가 되어야 자기 삶에 변화가 생긴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비록 헛된 것일지라도 그렇게라도 소망을 품고 기대를 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라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 바디매오는 주님께 자신의 소망을 두었던 것입니다. 나를 바꿔주실 분은 예수만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디매오는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주님을 향해 소리쳤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내 힘과 능력과 내 경험과 지식으로 내 삶을 바꿀 수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결코 주님을 찾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대부분이 하나님을 찾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을 몰라서일 수도 있지만 또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다른 이의 도움을 받으려 하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이유도 보면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일수도 있지만 내 힘으로 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막5장에 보면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한 여자가 주님을 만나 고침을 받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막 5: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5:26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5: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혈루증을 한번 고쳐보려고 많은 의사들을 만나서 약도 써보고 해볼 것 다 해봤는데 가진 재산만 다 허비하게 되고 아무 효험도 없고 증세만 더 심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자신이 해볼 수 있는 것은 다 해본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뭐가 들리게 됩니까? 예수님의 소문이 들리게 된 것입니다. 그전에도 분명 예수님의 소문이 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전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아직 해볼만한 것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해볼 것 다 해봐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예수님을 향해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의 시작은 내 힘으로는 안된다는 이 가난한 마음. 이 연약한 마음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고 세상 것을 의지하려는 마음이 남아있으면 우리가 주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습니다. 자신이 의지했던 것들이 다 사라지고 의지할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에서야 비로소 하나님을 찾고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후1장에서 고난에 대해서 이렇게 자기 해석을 했습니다.
고후 1: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1: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바울은 자신에게 오는 수많은 환난에 대해서 그것은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기 위한 고난이요. 환난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를 의지하고 자기 능력을 의지하며 살려고 하는지 모릅니다. 좀처럼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안 그런가요?
더구나 사도는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자기 일을 하고 있나요? 이 세상 일을 하는 것이 아니죠.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것은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어떠냐면 조금 가다보면 하나님을 안 보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바다위를 걸었을 때는 주님을 바라보았을 대였습니다. 그런데 조금 다가보니 주님을 안 보는 것입니다. 바람을 보고 파도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도 처음에는 주님을 봅니다. 그러다가 조금 가다보면 어느순간 주님을 안 보고 다른 것들을 보기 시작합니다.
참 이게 문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물에 빠질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 하나님께서 환난과 고난을 주셔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오는 환난이나 고난을 보면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고 극복할 수 없는 환난인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극복하고 넘어서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테니까요.
이것이 훈련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과정이라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환난을 이기고 극복하게 하는 훈련입니다.
이 훈련이 잘 되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다른 말로 하면 동역입니다. 혼자 다 하는 세계가 아닙니다. 반드시 함께 하고 같이 하는 것입니다. 작은 것이라도 그에게 맡겨주어서 그가 일 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구원의 역사를 홀로 다 하실거였다면 벌써 다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 구원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구원의 역사에 함께 동참해서 함께 구원의 방주를 지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 구원이 진정한 나의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함께 방주를 만들어 가야 하는데 그러자면 먼저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되어야 서로를 믿고 일을 맡기고 함께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타락한 인간의 역사를 보면 함께 일하지 않습니다. 힘 있는 자는 힘 없는 자를 마치 종처럼, 노예처럼 부리며 힘든 일을 시킵니다. 자신은 결코 하지 않습니다. 또 좋은 것은 결코 함께 나누지 않습니다. 혼자 다 차지하려고 합니다.
반면에 주님은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도 일하시고 아들도 함께 일하셨던 것이고 하나님의 기쁨이 곧 주님의 기쁨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이렇게 하나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안에 일어나는 수많은 문제와 고통이라는 것은 말씀을 알게 되면 우리가 하나되고 연합되지 못해서 생겨나는 것들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결국 문제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되지 못하고 연합하지 못해서 수많은 문제들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바디매오도 보면 왜 그가 앞 못보는 맹인이 되고 거지라는 비참한 인생이 되었을까요? 결국 그가 하나님과 분리되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온 삶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타락이 뭡니까? 하나님의 분리입니다.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분리되고 떨어져서 살게 되면 우리가 어떻게 태초의 창조의 모습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나니 그의 말로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돼지 먹는 쥐엄열매로도 자기 배를 채우지 못해 주려 죽는 비참의 극치의 인생이 되어버리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바디매오의 모습이고 하나님의 멀어진 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것이 회복이 되자면 주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하는가? 우리 앞에 있는 고난,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start point 가 된다는 것입니다.
자, 생각해보세요. 바디매오가 맹인도 아니고 거지도 아니었다면 주님께 나아왔을까요? 건강한 자라고 스스로 믿었던 바리새인들 – 이들은 주님께 나아왔습니까?
나에게 있는 수많은 아픔과 시련과 고난이 오히려 하나님을 만나고 주님을 만나게 해주는 구원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바디매오는 자신의 절망적인 상황을 통해서 좌절하고 무너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상황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자, 그가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까? 먼저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쳤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가만히 있으면 안되고 외쳐야 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절히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바디매오에게는 어떤 일이 생겼습니까?
10: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많은 사람들이 꾸짖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께 외친다고 해서 내 음성을 단번에 들으시고 나에게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는 주변의 사람들이 나를 꾸짖고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외치지 못하게 위협을 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포기하면 안됩니다. 돌아서면 안됩니다. 바디매오는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한번 외쳤는데 응답이 없다면 한 번 더 외치고 그래도 응답이 없다면 응답이 올 때까지 외쳐야 합니다. 기도도 그렇습니다. 한번 기도했는데 응답이 없고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포기하고 중단하면 안됩니다. 다시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이루어질때까지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루어질때까지 기도하겠다라는 각오로 기도해야 합니다. 조금 하다가 안되면 말지 이런 생각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창조의 세계가 그렇습니다. 적당히 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열매는 적당히 해서는 결코 맺혀지지 않습니다. 사랑이 적당히 해서 할 수 있는 것입니까? 99% 자기 아내를 사랑하고 1%는 옆집 여자를 사랑한다면 그것이 용납이 되겠습니까?
마22장에 보면 주님은 너희가 마음과 정성과 힘과 뜻을 다해 목숨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이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이렇게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열매가 된 것이고 우리도 열매를 맺으려면 이렇게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시고기라는 고기가 있는데요. 어미가 알을 낳고 모든 것을 수컷에게 맡기고 암컷은 최대한 알에서 멀이 떨어져서 죽는다고 합니다. 왜냐면 어미 냄새를 맡은 포식자들이 알을 잡아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면 이제 알들이 다 부화할때까지 아비는 밤낮으로 알들을 지키는데요. 그러다가 알들이 부화를 하게 되면 아비는 기력이 다 해서 죽게 되는데 새끼들이 태어나면 이제는 아비의 몸을 뜯어먹고 힘을 얻어 새로운 곳으로 떠난다고 합니다. 아비는 마지막까지 자기 몸을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다 내어준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따라 사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디매오는 적당히 외치다가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주님께 외치고 또 외쳤습니다. 그랬더니 결국 주님이 바디매오를 부르셨습니다.
10: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여러분, 포기하지 않으면 반드시 이렇게 응답이 올 때가 있습니다. 맹인이면서 거지였던 바디매오는 외칠 수 있는 입을 통해 결국 주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고 무엇을 주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어떤 능력으로 신분으로 혹은 지식과 권세로 주님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향해 부르짖기만 하면 주께서 우리의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를 부르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뭐가 없어도 내가 뭘 못해도 실망하지 마시고 주님께 기도하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주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드디어 바디매오가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10: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10: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10: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이 맹인이 주님께 원했던 것은 보기를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부귀 영화를 원했을 수도 있었을텐데 그는 눈이 떠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창조의 모습으로의 회복을 원했던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하셨습니다. 바디매오 안에 있었던 믿음, 그가 세운 믿음은 무엇이었습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그의 삶의 모습 – 바디매오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라면 자신을 변화시키고 회복시켜주실 수 있다라는 믿음. 이 믿음이 바디매오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능력은 주님 안에 있지만 그 능력을 꺼내오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믿음입니다. 우리도 이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