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5: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새로운 한달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신 이 귀한 한달을 승리하여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자,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이 한 달을 승리할 수 있을지 귀한 지혜를 얻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요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인해서 아버지의 사랑 안에 주님이 거하시고 또 주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인해서 주님의 사랑안에 거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계명을 지키는 것이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아 결국 에덴 동산에 거하지 못하고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느 나라를 가든지 어떤 곳에 있든지 그곳에는 다 법이 있고 질서가 있기 마련입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내가 로마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로마에 가면 그 나라의 법과 질서를 지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추방당하게 되든지 혹은 감옥에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
롬1장을 보면 이방인의 죄에 관한 말씀을 바울사도가 말씀하면서 가장 먼저 전했던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하나님의 진노였습니다.
롬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왜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나? 바울은 이들이 불경건과 불의의 죄를 짓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렇게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들을 내버려두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나라가 유지될 수 있겠습니까? 다 망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들을 벌하시고 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버지의 사랑안에 거하면 아버지께서 복을 주십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아버지의 사랑안에 거해야 아버지로부터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 중에 누가 이삭의 축복을 받게 됩니까? 원래는 에서가 형이었으니 에서가 복을 받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야곱이 대신 받게 되었습니다. 왜 이런 사태가 생긴 것입니까? 따지고 보면 에서가 아버지의 사랑안에 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배가 고프니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렸습니다. 팔아버릴 것이 있고 결코 팔아서는 안되는 것이 있는데 에서는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팔아버린 것입니다.
창 25:32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지금 이 자리에 에서와 야곱만 있는 것 같으나 이 자리에 누가 함께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있는 것입니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냐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유익이라는 단어를 보면 영어 성경을 보면 good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장자권은 분명한 good 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 배고픈 나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맞지요. 장자의 명분이 당장 에서의 배고픔을 해결해 줄 수 있나요? 안되죠. 못하죠.
이렇게 에서는 장자권을 유익한지 무익한지를 판단한 것입니다. 이 판단의 기준은 누구입니까? 바로 에서입니다. 이것이 선악과를 다 먹은 자의 모습입니다. 장자권은 자신이 뭘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에서가 노력해서 장자권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이것은 판단의 대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선과 악으로 유익하고 무익한 것으로 유리하고 불리한 것으로 판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립니다.
창 25:33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25:34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이렇게 에서는 아버지 이삭의 사랑안에 거하지 못하고 도리어 아픔과 슬픔과 근심 안에 거하는 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이 뿐입니까?
창 26:34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26:35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
에서가 이방 여자와 결혼을 함으로 인해서 이삭과 리브가의 근심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에서가 이삭과 리브가의 사랑 안에 거하지 못하니 결국 복을 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나에게 복을 주는 자가 있다면 또 나에게 복을 빌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사랑안에 거해서 그를 기쁘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그를 괴롭게 하고 힘들게 하고 근심이 되게 하면 복을 주고 싶어도 줄 수 없는 상황이 생기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안에 주님의 사랑안에 거하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사랑안에 거한다는 것은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계명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하라 하신 것이 있다면 성실히 하고 하지 말라 하신 것이 있다면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을 받지 못하는 것은 하지 말라 하신 것은 하고 하라 하신 것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심플한 이 원칙을 잘 지켜서 모두가 다 하늘의 복을 받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 때 기쁘고 행복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 행복한 인생, 기쁘고 즐거운 인생 살고 싶지 않나요? 누가 슬프고 괴로운 인생을 살고 싶겠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가 슬프고 괴로운 인생을 사는데 그것을 기뻐할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에게 주님께서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그 계명을 지키라고 말입니다. 여기에 행복이 있고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내 인생이 괴롭고 힘들다면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안에 있는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 있는가?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조상들의 이야기를 보면 크게 두부류의 사람들로 나뉘어집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자들,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 야곱의 열한번째 아들 요셉을 보면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안에 있었던 아들이었습니다. 요셉의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니 형제들이 요셉을 시기하고 질투하죠.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결국 애굽의 종으로 팔아버리게 되는데 이렇게 사랑을 받는 자는 주변으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남이 받는 사랑, 남이 받는 축복과 은총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못하니 배가 아프고 미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요셉을 지키시고 보호하셔서 그를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안에 거하는 자들은 결국 이렇게 은혜를 받고 축복을 받고 영화롭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 – 이 기쁨이 우리 안에 충만케 되기를 주님은 바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기쁨의 시작은 우리가 주님의 사랑안에 즉 계명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 계명이 뭘까요?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미 요13장에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우리가 이 말씀대로 서로 사랑하며 살기 원하잖아요. 누가 미워하며 살기를 원하겠습니까? 사랑하면 기쁘고 행복하지만 미워하면 아프고 괴롭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아프고 괴로운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몸이 아프면 만사가 다 귀찮아지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너무 아프면 죽고 싶은 생각까지 듭니다. 사람은 살고 싶지 죽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괴롭고 힘드니까요.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할수만 있으면 사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미워하면 미움을 받는 사람도 고통스럽지만 미워하는 사람도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미워하면서 행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은 이렇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사랑하며 살기를 원하는데 그런데 이 사랑을 모르는 것입니다. 사랑을 잘 아는 것 같 같은 정말 모르는 것이 사랑입니다.
동물의 세계를 보면 새끼들이 태어나면 부모를 보면서 배우는 것도 있지만 또 선천적으로 이미 알고 있는 본능의 세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후천적으로 배우지 않았는데 알고 있는 것입니다. 즉 태어나서 배우는 것이 있고 태어나기 전에 이미 배워놓은 것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태어나서 교육을 통해서 배우고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배우지 않았는데 아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교육이 된 것입니다.
사랑은 어떨까요? 선천적일까요? 후천적일까요? 사랑은 두가지가 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후천적으로 사랑을 배우지 못하면 잘 아는 것 같은데 정말 모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사랑을 잘 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사랑 잘 할 자신이 있나요? 창1:28절을 생육해야 번성도 하고 만물도 다스릴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먼저 사랑을 알아야 사랑을 하고 결혼도 하고 자녀도 낳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대부분 잘 모른 채로 사니까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고별설교에서 이 사랑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주님은 제자들에게 가장 큰 사랑에 대해서 가르쳐 주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왜 일까요? 가장 큰 사랑으로 크게 사랑하며 살라고 말입니다. 주님은 친구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목숨, 자기 몸, 자기 생명을 챙기고 지킬려고 하면 큰 사랑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자기 목숨을 잘 지키면서 하는 사랑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는 사람을 바꿔낼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한 사람도 온전한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키울 때 자기 것을 잘 지키면서 키울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한 명을 키우더라도 자기 것을 다 버리고 비워야면 제대로 키워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신 길이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 목숨까지도 버리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시작부터 이렇게 사랑하신 주님은 끝까지 이렇게 사랑하셨습니다. 이 변찮는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15: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주인이 하는 것을 종은 모른다고 했습니다. 종은 왜 모를까요? 종에게는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중요한 일을 종에게 가르쳐주겠습니까? 종에게는 그저 일을 시키기만 합니다.
그럼 주인이 하는 것을 누가 아는 것입니까? 주인의 아들만이 압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만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을 아십니다. 우리는 어떨까요? 당연히 모르죠. 그런데 주님께서 다 알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 이상 종이 아닌 것입니다.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시고 우리를 친구 삼아주셨기에 다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친구끼리는 다 알죠. 숨기는 것이 없고 가리는 것이 업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어디까지 가야 할까요? 주님은 우리의 스승이면서 우리의 신랑되시며 또한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하고 신부가 되어야 하며 또한 주님의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까지 가야 합니다.
사순절인데요. 이 기간이 주님의 친구가 되는 기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친구라는 말은 친할친에 오랠구입니다. 오랫동안 친한 사람. 친하게 지내려면 항상 가깝게 있어야 합니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친해질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친했던 사람이라도 서로 떨어지고 멀어지면 서먹해지고 어색해집니다. 주님을 가까이 하시고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셔서 주님의 제자이면서 또 주님의 친구가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친구가 되는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행하는 자. 그런 자가 주님의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