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al Church

고전13: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3: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13장은 사랑의 장이라고 합니다. 사도는 이 한장을 통해서 사랑에 관한 매우 깊은 세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전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13: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이 없이 하는 그 어떤 말이나 행동이나 능력도 사랑이 없는 믿음이나 구제나 희생까지도 그 모든 것이 사랑이 없다면 아무 의미가 없고 유익이 없다고 사도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사랑에 뿌리를 두지 않고 사랑과 연결이 되어 있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다 마치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이 파도가 치고 바람이 불면 다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가 깨달은 인생이었고 삶이었습니다. 동의하십니까? 사도의 말씀이 진리라면 우리가 열심히 좇고 있는 모든 것들이 사랑에 근거하지 않고 사랑의 동기가 없다면 다 헛된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랑이 없고 사랑이 아니라면 반드시 포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포기하게 되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상황적으로 큰 장애를 만나 길이 막힌다든지 그토록 재미가 있었는데 그 재미가 사라진다든지, 슬럼프에 빠진다든지 사고가 난다든지, 병에 걸린다든지 그리고 죽음은 가장 강력한 힘인데 이 죽음을 무엇으로 이길 수 이기겠는가? 이런 우리를 막는 여러가지 일들이 생길 수 있는데 사랑에 근거를 두지 않으면 이런 것들을 극복할 수가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사랑으로만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죽음도 이기는 능력이니까요. 주님께서 이것을 보이신 것이 아닙니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들, 또 앞으로 해야 하고 하게 될 일들이 사랑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인지, 사랑의 동기를 가지고 시작한 것인지를 생각해 보시고 그렇지 않다면 사랑의 동기를 찾고 사랑의 근거를 찾아 세워 일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한 사람을 찾아 가르치고 세울 때에도 어떤 마음으로 어떤 사랑의 기준으로 갖고 가야 하는가? 주님께서 보이신 사랑의 근거와 기준을 가지고 사랑하며 가르쳐야 하는 것이죠.

사도가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은 뭔지 아시겠습니까?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가를 잘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4절부터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고전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13: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13: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바울이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이것이 누구로부터 온 것입니가? 그리스도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랑이죠.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이런 사랑을 할 수 있고 이런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사랑은 먼저 오래 참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오래 참을 수 있는가? 얼마나 참아야 오래 참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또 사랑은 온유하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온유해야 온유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기준이 무엇일까요? 지금 바울 자신 안에는 정확한 사랑의 기준이 있고 사랑의 표준이 있는 것입니다. 그 표준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가운데 밝히 보여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기준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셔서 그 사랑으로 사랑하시다 다시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신 분바울은 평생을 그리스도라는 사랑의 표준이 되는 기준을 가지고 살았던 것입니다.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자기 안에 그리스도께서 산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사랑의 저울 같이 온전한 것이 자기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기준이 되고 표준이 되고 근거가 되고 동기가 되어 바울은 그렇게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지칠 수 없고 무너질 수 없었고 포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는 이런 흔들리지 않고 변함없는 사랑의 기준이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어떤 삶의기준을 가지고 살고 있나요? 내가 이것만큼은 절대 양보하지 않겠다는 것. 이것만큼은 절대 포기할 수 없고 놓치지 않겠다는 것이 있습니까?

절대 바뀌지 않는 삶의 기준. 사랑의 기준. 이것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할 때 이런 기준 없으면 어떻게 되는가? 상황과 환경에 따라서 또 자기 기분에 따라서 기준이 자꾸 바뀝니다. 기분이 좋고 은혜로울 때는 그래 열번은 참아야지.. 그러다가 은혜 떨어지면 두번까지는 참겠다. 두번이면 정말 많이 참은 거야.. 세번은 못 참아.. 이렇게 되지 않습니까?

바울은 회심 이후에 삶의 기준을 예수로 삼았는데 그러고 보니 이제는 자신의 중심까지도 예수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늘 자기를 중심으로 살던 사람이 어떻게 주님을 중심삼는 사람으로 바뀌는가? 사람이 중심이 바뀐다는 것이 쉽겠습니까? 사람이 안 바뀌는 이유는 중심이 안 바뀌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사람의 중심이 바뀌는가? 자기 삶의 기준이 들어와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삶의 기준이 달라져야 중심이 달라지고 변화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의 사건이 왜 새로운 시대로의 변화의 사건이 된 것인가? 세상 역사도 보면 BC AD로 나누잖아요. 이렇게 나누는 기준이 뭔가? 그리스도의 오심의 사건이잖아요.

그리스도의 오심이라는 것은 선의 기준이 세우진 것과 동시에 악을 심판할 수 있는 심판의 기준이 세워진 것이기도 합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죄로부터의 구원이기 때문에 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 죄인가? 선과 악을 가르는 기준이 없이는 죄를 알 수 있겠습니까? 무엇인지 죄인지 아닌지 분별이 되겠습니까? 기준이 표준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도 표준을 마련하는 것이 아닙니까? 예를 들어 어떤 물건을 살 때 이것이 불량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KS 마크가 있으면 안심하고 사지요. 왜냐면 이 KS마크라는 것은 국가 표준을 잘 지켜서 만들었을 때 인증을 해주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이런 마크가 없다면 인증이 안된 말하자면 질이 떨어진다든지 불량이든지 알 수 있는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타락이라는 것은 이런 절대 기준이 사라진 것입니다. 다 상대화가 되어서 자기가 마음대로 자기기준에 따라서 선을 정하고 악을 정하며 살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혼돈과 방황과 무질서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 이런 세상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이라는 것이 심판이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을 보면 어떻습니까? 다 기준미달이잖아요. 다 심판을 받을 수 없는 죄인들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잖아요. 방법은 뭘까요? 바울의 말처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게 영접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시대는 성령의 시대잖아요. 성령을 받아서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신기하게 이전에 그토록 용서가 안되고 참을 수 없었던 것이 용서가 되고 참아지게 됩니다. 아주 온유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됩니다. 예전에는 불같이 화내고 혈기부렸던 사람이 너무나 온유한 사람으로 달라져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볼 때도 이런 모습 없습니까? 예전과 정말 달라진 모습. 우리가 힘과 노력으로 불가능한 것들이 바뀌어져 있고 달라져 있는 모습을 보게 되잖아요.

,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고전13: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어린아이가 장성한 사람이 되면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게 되잖아요. 이렇게 사람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너무 자연스럽죠. 입맛도 그렇죠. 어렸을 때는 초딩입맛이었다가 어른이 되면 씁쓸한 것. 쓰디쓴 것이 맛있어요. 커피. 자몽 등등. 쓴 것. 이런 것이 맛이죠. 입맛이 달라집니다.

이것이 정상입니다. 우리의 영도 이러면 좋을텐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항상 어린아이처럼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참지 못하고 인내하지를 못합니다. 어린아이들이 참지를 못하잖아요.

여러분, 어린아이가 시간이 흐른다고 저절로 장성한 자가 되지 않습니다. 몸은 성장해서 키도 크죠. 그러나 그가 오래 참을 수 있고 온유한 사람이 되는 저절로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든 것 중에 하나는 자신이 변화되고 싶은데 잘 안되기 때문이죠. 이토록 오래 신앙 생활을 해왔으면 바뀔때도 된 것 같은데 좀처럼 안 바뀌는 것입니다. 요즘 저의 기도제목은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물건을 하나 사더라도 중고제품 보다는 새 제품을 사고 싶잖아요. 중고제품은 어딘가 고장이 나 있을수도 있고 뭔가 문제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러면 바로 사용할 수가 없잖아요. 우리 안에 이런 고장난 부분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바로 쓰실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고장난 부분을 알아서 먼저 고쳐야 합니다. 12절 보시면

13: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왜 지금은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희미한가? 왜 부분적으로 밖에는 모르는가? 고장난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여야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처럼 확실히 보고 온전히 알 수 있을까요?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결론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어린아이에서 장성한 사람이 되고 얼굴과 얼굴을 맞대 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온전히 주를 아는 사람이 되자면 세가지가 항상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믿음, 소망, 사랑이라고. 그러나 이 중에 제일을 뽑는다면 사랑이라고. 왜 사랑이 제일이냐? 믿음도 소망도 그 근거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위한 믿음, 사랑을 위한 소망. 사랑하기 위해 믿음이 필요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소망도 필요한 것이니까요. 우리가 하는 일 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사랑하며 살려고 땀흘려 일하고 힘들어도 참고 견디며 사는 것이 아닌가? 사랑할 사람이 없다면 왜 그렇게 힘들게 살겠습니까?

계시록에 보면 참으로 훌륭했던 에베소교회를 책망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왜 에베소 교회가 책망을 받았는가?

2: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2: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2: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처음 사랑이라는 것이 뭘까요? 주님으로부터 받은 하나님의 사랑의 힘으로 고난도 이기도 어려움도 이기고 살아왔는데 어느순간 이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기계적으로 의무감으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이런 모습은 없습니까? 우리 안에 이런 모습이 있다면 주님의 이 말씀을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항상 주님은 먼저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십니다. 주님이 하시지 않은 일을 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왜냐면 우리는 주님께서 하시는 것을 봐야 따라 할 수 있는 자들이니까요. 주님이 우리에게 하신 사랑의 행위, 사랑의 삶을 보면 우리도 따라 살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께서 행하신 사랑의 삶을 보지 않으면 점점 잊어버립니다.

왜 처음의 뜨거운 사랑을 버렸겠습니까? 주님의 사랑을 보지 않고 다른 사랑을 보면서 주님의 사랑과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뜨거웠던 사랑도 결국은 식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항상 잘 보면서 살아야 하는데 주님의 사랑이 잘 보이는 곳이 있습니다. 어딜까요? 묵상해보십시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잘 보이는 곳은 앞자리죠. 항상 주님 앞으로 나아오시면 주님의 사랑이 잘 보일 것입니다. 기도의 자리, 말씀의 자리, 예배의 자리 등등. 여러자리가 있지만 주님과 가장 가까운 자리는 선교의 자리가 아니까 싶습니다.

주님과 가까운 자리에서 주님의 사랑을 보고 그 사랑으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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