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al Church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창 창49:8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49:9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49:10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49:11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49:12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의 이는 우유로 말미암아 희리로다

첫번째 본문을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은 뭘까요? 이것은 겉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겉모습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속이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죄를 짓기에 빠른 발을 가진 자로서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죄가 죄인지도 모른 채 수많은 죄를 짓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은 이제는 이런 삶에변화가 왔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이런 삶을 따라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로 새로운 길을 따라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자들인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자라 할지라도 이전에 아무리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고 사명을 감당한 자라 할지라도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이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새로운 것이 있습니까?

1: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해 아래에 새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똑 같은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 안에서 새 것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을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그리스도 안에 라는 말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번째 본문은 창49장을 보면 야곱이 죽기 전에 자기 아들들에게 했던 유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야곱의 네번째 아들이었던 유다에게 했던 예언을 보면

49:8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49:9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49:10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49:11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49:12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의 이는 우유로 말미암아 희리로다

유다의 뜻은 하나님의 찬송이라는 뜻이고 유다를 사자 새끼라고 했습니다. 사자는 동물의 왕입니다.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에게서 떠나지 않고 모든 백성이 그에게 복종한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이었던 다윗이 바로 유다지파 사람이었고 예수님도 유다지파에서 태어났습니다. 야곱의 이름이 승리자라는 뜻의 이스라엘이 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뭐라고 부릅니까? 유대인이라고 하죠. 그 이유가 뭘까요?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다윗과 솔로몬 이후의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을 때 이스라엘의 열두지파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갈라집니다. 남쪽은 유다와 소수의 베냐민 지파로 형성된 남유다가 되고 북쪽은 나머지 열지파로 형성된 북이스라엘이 됩니다. 나중에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망하고 남유다는 바벨론에게 망하게 되는데 유다지파는 바벨론의 포로 시절에도 끝날 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남아 후에 백성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다시 나라를 건설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대인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유다지파는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믿는 자들은 이 시대수많은 사람들을 이끌어야 할 영적 유대인들입니다. 따라서 야곱이 유다에게 했던 이 예언은 우리 믿는 자들, 크리스천들에게 주는 예언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언을 잘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다 멸망하고 포로가 되었다 할지라도 이들이 끝까지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이 예언을 놓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예언을 다시 보면

49:11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먼저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맨다고 했습니다. 먼저 당시 가축 특히 나귀는 없어서는 안되는 너무나 소중한 재산이었습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항상 나귀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짐을 실기도 하고 나귀에 타기도 하고. 22장에 보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하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향했습니다. 모리아 산에 도착해서는 이삭이 번제에 쓸 나무를 지고 올라갔지만 그전까지는 이 나귀가 모든 짐을 다 지고 갔던 것입니다. 나귀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복음서에도 보면 나귀와 관련된 매우 소중한 이야기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11: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11: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11: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11: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11:5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11:6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주님께서 제자 둘을 보내 나귀 새끼를 풀어서 끌고 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지금 뭐하는 거냐고. 왜 나귀 새끼를 끌고 가려고 하느냐? 고 물으면 주가 쓰시겠다고 말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나귀는 여러 용도로 쓰임을 받는 귀한 가축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귀하게 쓰임받는 일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주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태우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백마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수 있었지만 주님은 초라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이것은 초라한 나귀와 같은 자들을 부르셔서 귀한 역사 가운데 귀하게 쓰임받게 하시려는 주님의 말할 수 없는 사랑과 믿음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을 보면 한결같이 너무나 초라한 자들이 아니었습니까? 당시 로마시민권을 가졌고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던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이 전도되어 사도가 되었지만 그는 그리스도인을 핍박했던 너무나 큰 죄인의 괴수일 뿐이었습니다. 누구도 자격 있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자들을 부르셔서 이들과 함께 위대한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가시려 했던 것입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참으로 멋지고 위대한 말씀입니다. 누가 이런 초라하고 연약하고 죄많은 나를 부르셔서 귀한 일에 쓰시려 하는가? 바로 주님이라고. 그런데 보세요. 다 세상의 수많은 것들로 인해서 다 매여 있고 묶여 있고 잡혀 있는 것입니다. 이미 나귀의 임자가 다 있는 것입니다.

나는 무엇에 매여 있는 자입니까? 무엇이 나를 잡고 있는가? 우리가 주님을 믿고 나서 전에 나를 매이게 했던 것들로부터 다 끊어졌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나를 잡고 있는 것은 없는가? 나를 잡고 있던 것들로부터 끊어진 만큼 주님께로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야곱이 유다에게 뭐라고 예언했습니까?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주님을 모시고 하나님 나라의 도성에 입성할 자기 백성들을 포도나무에 붙어 있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있다면 그들도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붙어 있게 하고 주님 안에 거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15: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우리의 삶이 메말라지는 이유가 뭘까요? 비가 오지 않아 물이 없으면 온 땅의 풀과 나무가 말라지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떠나면 마치 이렇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이 우리의 영혼의 물이라는 것입니다.

58:11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왜 인류의 문명이 물이 많은 강가에서 시작하고 발전했는데 그 이유는 사람은 물이 있어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멋진 곳이 있다 할지라도 그곳에 물이 없다면 사람이 살 수 있겠습니까? 물이 없는 사막에게서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삶이 포도나무이신 주님과 연합하고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이 될 수 있다면 그곳은 물댄 동산처럼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과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항상 그곳에서 풍성한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을 보세요. 그곳에는 각종 나무의 실과가 가득 열리는 곳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풍성한 열매가 맺힐 수 있는가?

끊어지지 않는 샘 물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자면 우리의 삶이 또 우리의 자녀가 우리가 사랑하는 자들이 포도나무이신 주님과 연합하고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가나안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는데요. 이것은 주님 안에 거하는 땅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주님 밖에 있으면 그곳이 아무리 좋은 땅이라 할지라도 그곳이 축복이 땅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저주의 땅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보면

49:11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라고 했습니다. 옷은 우리가 잘 알듯이 우리의 행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실이 깨끗하면 문제가 없지만 더럽기 때문에 빨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지만 은혜로 받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행실은 여전히 죄를 짓기 좋아하고 죄에 물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포도주에 빨고 포도즙에 빨아야 합니다. 포도주에 옷을 빨면 물이 들잖아요. 우리의 삶이 포도주 이신 주님의 삶에 물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죄에 물든 우리의 행실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어떤 영상을 하나 봤는데요. 깨끗한 물이 담긴 컵에 흙을 한 숟가락 퍼서 넣었습니다. 그러면 흙탕물이 되겠죠. 이 물을 어떻게 하면 다시 깨끗하게 할 수 있을까요?

컵 안에 있는 흙을 분리해내려고 숟가락으로 떠 내려고 하면 할수록 어떻게 되는가? 잘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컵에 담긴 물까지 같이 버려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깨끗한 물을 흙이 섞인 더러운 물에 계속 붓는 것입니다. 그러면 물이 깨끗하게 점점 깨끗하게 됩니다. 깨끗한 물이 계속 들어가니까요. 흐르는 물이 깨끗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더러운 것이 들어와도 계속해서 깨끗한 물이 흘러주니 결국 물이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 여러분, 우리 속에 있는 더러운 행실들을 어떻게 깨끗하게 할 수 있는가? 우리 힘으로 우리 속에 이미 들어와 있는 나쁜 생각들, 불신, 미움, 등등. 이런 것들을 어떻게 깨끗하게 할 수 있는가? 포도주에 빨라고 했습니다. 달리 말하면 포도주로 채우면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는 경건의 모양들 예를 들면 말씀을 보고 기도를 하는 것. 예배를 드리고 봉사를 하고 전도하고 헌신하는 모든 것들은 포도주와 같은 주님의 삶을 우리의 삶에 가득 채우는 행위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계속해서 들어오면 우리 속에 있던 더러운 생각들, 더러운 것들을 밀어내서 다 빠져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경건의 훈련이 너무 중요합니다. 이것을 게을리 하는 자에게 어떤 변화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2장에 보면 포도주가 떨어진 혼인 잔칫집에서 주님께서 하인들에게 돌 항아리 여섯개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물을 가득 채우니 주님께서 물을 맛 좋은 포도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채울 만큼 채우고 나면 그 때부터 변화가 생기는 것입니다. 기적의 역사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흘러 넘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전도도 어떻게 되는가? 내 안에 넘치는 세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넘쳐야 그것이 다른 이들에게 흘러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흔들어 넘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흔들어 넘치게 하시는 하나님. 언제 사람이 감동을 받습니까? 생각하고 기대한 만큼 받으면 감동이 없습니다. 그 이하로 받으면 실망하지만 그것을 초과해서 받으면 즉, 우리의 기대치를 넘어설 때 감동이 되는 것입니다. 흘러 넘치는 세계가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 절을 보면

49:12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의 이는 우유로 말미암아 희리로다

흘러 넘처야 눈이 포도주로 인하여 붉게 되고 이가 희어진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가야 합니다. 말씀으로 우리의 언행이 바뀌고 우리의 삶이 포도주와 같은 거룩한 삶으로 바뀌어져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이고 그럴 때 우리의 삶이 누구도 참소할 수 없는 새로운 피조물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에 먼저 이런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것이 흘러 넘치면 우리의 교회와 우리의 지역과 우리가 속한 모든 곳에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런 변화가 우리를 통해서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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