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al Church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3: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3: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3: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3: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3: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갈라디아서를 자유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우리를 자유케 해주는 복음이라는 말인데 우리의 삶 가운데 자유를 잃어버리고 마치 종처럼 살고 있는 모습은 없는가? 무엇이 우리를 종과 같이 살게 하는가? 오늘은 갈라디아 교우들에게 보낸 바울 사도의 편지를 함께 보면서 갈라디아 사람들안에 있었던 문제가 우리에게는 없는지 돌아보면서 나는 신앙을 점검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누가 너희를 꾀더냐? 유혹했느냐? 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꾀임을 당했고 유혹을 당했다는 말입니다. 유혹당하지 않았다면 어리석다는 말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미 갈라디아 교회 사람들안에 유혹당한 모습이 있는데 사도는 이것이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유혹당할 수 없고 유혹당해서는 안되는 것인데 그렇게 된 것이니 그러므로 참으로 어리석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찌 그럴 수 있느냐? 라는 것입니다.

마귀의 여러가지 수식어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유혹자입니다. 어떻게 마귀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가?

공에 줄을 매달아 돌리면 원운동을 하게 되는데 그러면 원심력과 구심력이 생기는데요. 구심력이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돌릴 수 있는 원의 크기가 결정이 됩니다.

원심력이 아무리 커도 구심력이 원심력보다 강하면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구심력이 원심력보다 작으면 줄이 끊어집니다.  

우리의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과 가까워지려는 구심력이 있고 반대로 멀어지려는 원심력이 있습니다. 주님과 우리와의 구심력은 무엇입니까?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우리를 위한 십자가의 희생. 이것이 우리가 주님께로 향하는 구심력입니다. 이것이 강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마귀의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습니다. 사도는 우리에게는 너무나 강력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구심력이 있는데 왜 너희가 유혹을 당하는가? 참으로 어리석도다 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지속적으로 우리의 이런 주님께로 향하는 신앙을 약화시켜려고 합니다. 하나님과 멀어지려는 원심력을 크게 만들려고 합니다. 뭐라고 유혹할까요? 너가 맘먹고 노력만 하면 너는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너가 하고 싶은 것 하며 기쁘고 행복하게 살라고 합니다. 매이지 말고 구속받지 말고 네 인생 너의 것이니 자유롭게 살라고 합니다. 점점 하나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래서 하나님 없는 세상과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자유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를 빼앗기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멀어진 자들 안에 자유가 있는가? 15장에 보면 탕자의 비유가 나오는데 아버지 집을 나가 먼 나라에 갔던 탕자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유해졌습니까? 먹고 살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자유를 다 빼앗기지 않았습니까? 살기위해서는 돼지라도 쳐야 하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기 싫어도 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습도 보면 하나님과 멀어져 있을 때 우리는 어떠했나? 잘 먹고 잘 살았습니까?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 먹고 잘 살았습니까? 그렇다면 왜 이들이 고통 중에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었겠습니까?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부르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은 자들을 하나님이 구원하실 수 있겠습니까?

3: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3:8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3:9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3: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이 먼저 있었고 이들의 고통을 아셨기에 하나님이 이들을 부르시고 애굽을 나오게 하신 것입니다. 그럼 이제 이들이 가나안까지 믿음을 세워 직진해서 들어가야 할텐데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멀어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나? 이들을 돌게 하십니다. 하나님과 멀어지려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돌게 하십니다. 광야에서.

13:17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13:18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블레셋 사람의 땅을 통하면 가나안에 빠르게 갈 수 있는데 그러자면 블레셋 사람들과 전쟁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을 하게 되면 힘들고 고되고 죽을 수도 있다는 불안과 두려움으로 인해서 이들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 것을 아시고 어떻게 하시나? 홍해의 광야 길로 돌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블레셋 군대와는 안 싸워도 되는 것입니다. 그대신 광야의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습니다. 나중에 보면 광야에서 40년을 돌리십니다. 하나님이 사십년을 돌리겠다고 계획했습니까? 이들이 믿음을 세우지 못하고 돌다보니 40년이 된 것입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1세대들은 다 까마귀 밥이 되어 죽어버렸습니다. 40년을 돌아도 못 들어갔습니다. 나중에 가나안에 들어간 자들은 믿음을 세운 이스라엘의 2세들이 여호수아와 같이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여러분, 우리도 믿음을 세우지 못하고 하나님과 멀어지면 돌다가 끝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싸움을 하기 싫어하고 피하려 하면 하나님께서 싸우게 하지 않습니다. 그대신 돌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수많은 세월, 수많은 시간 하나님과 멀어지고 아버지 집을 떠나게 되면 탕자가 살기 위해 돼지를 길러야 했듯이 우리도 원하든 원치 않든 부정한 일을 하고 어리석은 일을 하면서 우리의 시간을 다 잃어버리게 되고 또 믿음을 세우지 못하면 광야로 떠돌 듯 돌다가 귀한 우리의 시간이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생명과 같은 시간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우리에게 베푸신 주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고 그 사랑과 은혜에 빚진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뭡니까? 하나님을 빚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의 돈을 뜯어냈던 세리처럼 우리가 영적 세리가 되어서 하나님께 자기가 원하는 것을 뜯어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사람들을 책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3: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바울이 묻는 것입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지금 이 사람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믿음과 은혜에 근거한 신앙이 아닌 행위와 공로에 근거한 신앙으로 변질되려 했던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이런 모습은 없습니까? 자신의 선한 율법적 행위와 공로로 성령을 받고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생각. 마치 일정한 돈을 주면 성령도 살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행전 8:18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이 시몬은 누구입니까? 베드로가 아닌 마술사 시몬이었습니다.

행전 8:9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8:10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따르며 이르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8:11 오랫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그들이 따르더니 

8:12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8:13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이 마술사 시몬이 빌립을 따라다니며 세례도 받았습니다. 겉으로 볼 때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아직 변화되지 못한 생각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이곳에 와서 성령을 받지 못한 자들에게 안수를 하니 성령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시몬이 베드로에게 돈을 주면서 자신도 성령을 주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합니다.

8:18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8:19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8:20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8:21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8:22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8:23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8:24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않게 하소서 하니라

이 시몬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선물로 주시는 성령을 돈을 주고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돈을 주고 사면 그것이 선물입니까? 선물은 은혜로 값없이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얼마나 이런 모습이 많은지 모릅니다. 성령을 값을 치르고 사겠다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값을 치르고 살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잘못된 생각을 가진 자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습니까? 복을 주시면 이 잘못된 생각이 맞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그냥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까? 우리가 값을 치르고 싶어도 치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값으로 매길 수 없는 너무나 귀한 것이고 값비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치 그것을 내가 이정도의 값으로 살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면 그때부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일을 해서 돈을 드려서 율법을 잘 지켜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율법적인 뇌의 구조는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내가 이 정도 하면 되겠지 라는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생각한 수준까지 막 합니다. 그런데 결과가 원하는대로 되지 않을 때 - 그럴 때 미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평과 불만과 원망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까?

내가 이정도 했는데 왜 안 주시냐고. 할만큼 했다고 생각하는데 왜 안되는 거냐고. 모든 판단의 기준이 자기 생각에 있는 것입니다. 할만큼 했다는 것은 누구 기준입니까? 하나님의 기준입니까? 아니잖아요.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에 부합이 되어서 뭔가를 정당하게 얻어낼 수 있는 것이 하나라도 있을까요?

5: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할례라는 것은 율법의 행위를 대표하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으면 이라는 말은 너희가 할례를 통해서 즉 율법적 행위를 통해서 구원을 받으려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는 말 그대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려 오신 것인데 내가 하는 할례를 통해서 즉 율법적 행위를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예수가 필요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혹 우리 안에도 이런 생각은 없습니까? 내가 뭘 해서 내가 열심히 묵상하고 수련하고 인내하고 공부하고 노력하고 금식하고 그러면 내가 어느 일정 수준에 이를 수 있다는 생각. 이것이 스스로 의 힘으로 구원을 얻는 자력종교와 다를게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기준이 있다면 뭘까요?

5: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졌다고 했습니다. 율법의 모든 것을 다 지켜야 의로워질 수 있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한가? 겉으로 드러나는 율법적 행위는 어떻게든 지킨다고 해도 우리 마음 속에 있는 탐심이나, 영적 간음이나 미움을 어떻게 다스릴 수 있겠나? 불가능합니다. 이런 불가능한 길을 가려고 하는 자들은 결국 어떻게 될까요?

5: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지게 됩니다. 우리 안에 왜 은혜가 없는가? 은혜가 왜 은혜가 되지 않는가? 율법적 행위에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이런 자에게는 무엇을 주어도 그 어떤 것도 은혜가 되지 못합니다. 항상 불평, 불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의 이 권면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3: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우리의 모든 시작은 알고보면 다 성령으로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먼저 찾아오셨고 우리에게 귀한 말씀을 주시고 성령의 은혜를 주셔서 우리의 신앙을 시작하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으로 시작한 우리의 신앙이기에 우리는 마지막까지 성령의 은혜에 힘입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육체로는 즉 인간적이고 율법적인 행위로는 결승점까지 도착할 수가 없습니다. 도중에 다 포기하게 되고 딴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딴 길로 가지 않으려면 늘 처음처럼 예수님과 동행하고 성령의 은혜를 구하며 은혜에 힘입어 살아 가야 하는 것입니다.

3: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3: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3: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여러분, 누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혈통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면 이미 아브라함의 혈통적 자손들 즉 유대인들은 버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들이 버림을 받았나?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자들이 되어야 하는가? 두말할 것도 없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이 아닌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 그들이 하나님이 자녀임을 알고 성령으로 시작해서 성령으로 마치는 자들 성령으로 시작했으니 성령으로 끝까지 함께 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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