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8: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로마서8장의 마지막 부분이면서 또 구원의 결론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구원의 결론이 뭘까요? 이 말씀 통해서 구원이 무엇인지를 알고 구원의 길을 따라사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보면
롬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누구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끊어질 수 있는가? 사랑이 끊어질 수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끊어지는 사랑입니다. 죽음이 뭘까요? 끊어지는 것이고 단절되는 것입니다. 아담에게 창2장을 보면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죽는다는 것이 뭘까요? 하나님과 연결된 끈이 끊어진다는 것입니다. 무슨 끈인가요? 사랑의 끈이고 믿음의 끈인데 이것이 끊기게 되면 그것이 곧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몸이 죽는 것만 죽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죽음은 사랑이 단절되고 믿음이 끊어지면 죽은 것입니다. 아기들을 보면 부모님의 사랑과 믿음으로 사는 것이죠. 부모의 사랑이 없고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타락은 우리를 향한 강력한 하나님의 사랑과 믿음에서 스스로 떨어져 나와 소외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사랑에서 믿음에서 떨어져 나와 있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다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해주셨습니다.
이렇게 연합된 자들은 어떤 어려움이 와도 이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뭐라고 했습니까? 어떤 환난이 오고 곤고나 박해가 오고 기근이나 위험이나 칼이 목에 들어와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39절에서는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자,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있는데 이 사랑은 결코 끊을 수 없고 끊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죠? 사랑이 언제 사라질까요? 누군가를 사랑해보셨나요? 그 사랑이 언제 사라지나요?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이전 사랑이 사라집니다. 정확히 말하면 사랑이 이 사람에서 다른 사람으로 옮겨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사랑이 쉽게 옮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옮겨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옮겨지지 않았습니다.
삼상 12:22 여호와께서는 너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셨으므로 여호와께서는 그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
삼상12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들도 다른 나라와 같이 왕을 세워달라고 합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왕은 하나님 한 분이신데 이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들을 위한 왕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면서 마지막으로 이들에게 당부하는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하신 일이 무엇이었는지를 사무엘이 말하는데요. 8절에 보면 모세와 아론을 보내 이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가나안에 살게 하셨고 또 많은 원수들로부터 이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왕을 세워 달라고 한 것은 이들에게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어떨까요?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잠도 주무시지 않고 눈동자처럼 지키시고 이들과 함께 하기 원하셨던 하나님이신데 이들은 하나님을 헌신짝 버리듯 버리고 새로운 왕을 찾아 세워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백성들에게 어떻게 하셨습니까? 사무엘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삼상 12:22 여호와께서는 너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셨으므로 여호와께서는 그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
하나님은 이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셨다고. 후회하고 탄식하실 수 밖에 없는 그런 모습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백성 삼으신 것을 기뻐하신 하나님이라고. 뿐만 아니라 너희가 하나님은 이들을 버리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 이렇게 말합니다.
12:23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
사무엘도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기를 쉬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를 멈추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이들이 얼마나 밉겠습니까? 그렇게 이들을 사랑하시고 기뻐하시고 이들에게 복을 주신 하나님을 버리고 왕을 세워달라고 하는 이들을 향해 저주하고 분노하고 싶었을테지만 그러지 아니하고 이들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끝까지 다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닙니까? 그가 어떻게 나오든지 간에 나는 나의 사명을 다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사명이 뭡니까? 사랑의 사명입니다. 사랑할 책임을 다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부합니다.
삼상 12:24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마음을 다해서 진실되게 섬기라고. 하나님은 이렇게 늘 처음처럼 한결 같은 사랑으로 이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으니 너희도 그 사랑을 기억해서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진실함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사라지거나 옮겨지지 않았습니다. 왜 그 사랑을 옮기시지 않을까요? 우리는 마음에 안들면 얼마나 쉽게 옮깁니까? 쉽게 마음이 떠나버리잖아요.
우리가 신앙을 왜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배워서 우리도 이렇게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누가복음15장을 보면 예수님이 세가지 비유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첫번째는 잃어버린 양의 비유가 나오고 두번째는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의 비유가 나오고 세번째는 탕자의 비유가 나오는데요.
이 세가지 비유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게 되는 비유입니다. 어떻게 다시 찾게 됩니까? 잃어버린 양의 비유와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는 직접 찾아나섭니다. 목자가 양을 찾기까지 찾아나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찾게 되어 어깨에 울러내고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눅15: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15: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15:5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15: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목자가 찾을 때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찾기 때문에 결국 찾게 되는 것입니다. 두번째 비유도 보면
눅15:8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15:9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드라크마를 잃어버린 여자가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는다고 했습니다. 찾을 때까지 부지런히 찾기 때문에 결국은 찾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고 주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찾으시는 사랑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즉, 내가 그 사랑을 떠나도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히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언제까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까?
요13장을 보면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도 사랑하시되 끝까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과 다른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주님의 사랑을 가지고 서로를 끝까지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세번째 비유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탕자의 비유인데요. 이 비유에서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 집을 나갑니다. 아버지를 떠난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는 떠난 아들 그래서 잃어버린 아들을 아버지가 찾으러 나가지 않습니다. 왜 그렇죠? 앞에 잃어버린 양의 비유와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에서는 목자와 여자가 찾기까지 찾은 이유가 있습니다. 스스로 돌아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 이 땅에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까?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셔야 우리가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창4장을 보면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립니다. 이들은 누구입니까? 하나님께 죄를 짓고 좇겨난 죄인의 아들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들의 제물을 받아주실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다면은 어떻게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죠. 자식이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부모는 어떻습니까? 자녀를 버릴 수 없고 포기할 수 없고 외면할 수 없습니다. 용서하고 또 용서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을 받아주시고 다시금 하나님께로 나아올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 일입니까? 그런데 형 가인은 어떠했습니까? 불만이 가득합니다. 왜 내가 아닌 동생의 제물을 받아주었느냐고. 내가 형인데. 가인과 아벨이 남남입니까? 이들은 한 가족이고 한 형제지간입니다. 형이 잘 되면 동생이 덕을 보는 것이고 동생이 잘 되면 형이 덕을 보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한 몸으로 지으셨습니다. 한 몸인데 마음이 나눠지고 생각이 분리되니 남남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가 되지 못하고 한 몸이 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축복을 주시고 은혜를 주셔도 그것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가인이 결국 아벨을 죽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열어주신 축복의 문을 닫아버린 것이고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는 길을 막아버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시금 그 길을 열어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이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삭개오가 주님을 보고 싶었는데 볼 수 없으니 뽕나무를 찾아 올라갔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삭개오에게 찾아오신 것처럼 그래서 그의 집에 유하신 것처럼 우리가 갈 수 없다면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바울은 갈2장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고 이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께서 나를 살리기 위해서 죽으셨으니 이제 내가 주님의 삶을 대신 살겠다는 것입니다. 주를 영접한 우리들은 주님의 사랑의 삶을 이어가는 자들입니다. 주님께 나아올 수 없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손수 찾아가신 것처럼 우리가 주님의 그 삶을 이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주의 잃어버린 양들을 찾듯 주의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잃어버린 참 목자이시고 참 아버지되신 하나님을 찾아 만나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탕자의 비유에서는 아버지가 탕자를 찾으러 나가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죠.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길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는 탕자가 스스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대신 그를 데리고 올 수 없습니다. 아버지도 그렇게 못하고 하나님도 그렇게 못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아는 자들입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스스로 마음을 돌이키고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탕자는 어떻게 돌아오게 되었습니까? 먼저 탕자는 가진 것을 다 탕진한 후 궁핍하게 되었고 먹고 살기 위해서 돼지치는 일을 하게 되었고 그러나 배를 채울 수 없어 배고파 죽을 지경이 되니 아버지 집이 생각나게 되었습니다.
눅 15: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5: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5: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이렇게 탕자가 돌아오기까지 아버지는 무엇을 했습니까?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탕자를 봤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손꼽아 탕자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탕자는 아버지를 떠났다 할지라도 아버지는 아들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항상 그 자리에서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아버지.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잊지말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습니다. 그가 어떤 모습이라 할지라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거지가 되어 돌아와도 기뻐하시며 그를 위해 잔치를 열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본문을 다시 보면
롬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8: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면 이제 외부로부터 오는 그 어떤 어려움과 환난과 위험이 있다할지라도 그것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넉넉히 이긴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순절을 지나 부활절을 보냈고 이제 오순절까지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는 이 모든 길을 사랑을 알고 사랑으로 가는 길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을 알지 못하면 갈 수 없는 길인 것입니다. 신앙이 성숙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사랑에 깊어진다는 것입니다. 깊어진 만큼 우리가 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할만한 사람만 사랑하지 말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왜 우리가 원수까지 사랑해야 합니까? 우리가 이렇게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먼저 원수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받았기에 우리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정말 미운데 그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 원수를 사랑하는 그 분을 보고 내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분이 누구입니까?
롬8장까지가 구원의 결론이라고 했습니다. 구원의 결론은 그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구원의 길을 따라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