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요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롬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가지고 사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창세기1장을 보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1차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자들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하나님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이것만 제대로 알아도 우리는 많은 부분에서 우리의 인생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늘에 떠 있는 태양과 달을 비교해보면 태양은 스스로 빛을 냅니다. 그런데 달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합니다. 달은 태양의 빛을 받아서 그 받은 빛을 반사해서 빛을 냅니다. 그래서 깜깜한 밤에도 달이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즉 달은 태양의 빛을 받아야 달의 존재가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마치 태양과 달의 관계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빛을 내는 태양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달처럼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빛을 받아야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볼 수 있고 나타내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채 살아가는 자들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존재를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보이지가 않으니까요. 이게 왜 문제가 되는가? 우리가 어떤 물체 예를 들면 공구의 용도를 모르면 혹은 사용법을 모르면 그 공구를 잘 쓸수가 없습니다. 무용지물이 되든지 아니면 잘못 쓰다가 망가지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의 삶도 이렇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밝히 보여주고 정확하게 가르쳐주시는 하나님께로 나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내가 누구인지를 내가 무엇을 해야 할 나인지 내가 어떤 길로 가야 어떤 방향을 향해서 가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 속에는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인데 우리는 이 말씀처럼 하나님을 닮아 살아가도록 창조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존재의 목적입니다. 내가 왜 사는가? 내가 왜 존재하는가? 이 목적을 잃어버리면 우리가 뭘 해도 제대로 산 것이 아닌 것이 됩니다. 직무유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맡은 일이나 책임을 다하지 않고 방치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아무리 열심히 살고 많은 일을 하면서 바쁘게 살아도 그것이 칭찬거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마20장에 보면 포도원의 품꾼 비유가 나오는데 집 주인이 품꾼들을 부를 때 이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장터에서 놀고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놀고 있는 자들 데려다가 일을 시킨 것입니다. 주인이 종에게 시킨 일이 있는데 그것은 하지 않고 다른 일들을 아무리 많이 했어도 시킨 일을 하지 않으면 그것은 잘 했다고 볼 수 없는 것이고 주인을 무시한 행동이고 또한 직무유기입니다. 논다는 것은 뭡니까?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을 논다고 말하지 않죠. 이것은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논다는 것은 자기 할 일이 없는 것이고 자기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doing nothing 혹은 standing idle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일하지 않고 교회에 가는 것이 노는 것으로 보일 것이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반대가 노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헛되고 무익한 노는 인생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빛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빛을 통해서 내가 누구인지를 밝히 보고 알아야 합니다. 그럼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하는 그 하나님의 형상이란 구체적으로 뭘까요?
갈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가 우리가 닮아서 살아가야 할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려고 노력하고 애쓰며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형상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과는 반대되는 죄적 실존의 모습도 함께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이렇게 말해놨습니다.
갈 5: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5: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5: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이런 사탄 마귀로부터 온 죄가 우리 속에 함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고 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경건의 훈련, 신앙의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게을리하면 우리의 인생이 헛된 인생이 되고 노는 인생, 직무유기의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자,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요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주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택하여 세우셨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택함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누구의? 주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놓치지 않으면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흔들릴 수 없고 넘어질 수 없습니다. 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어 쓰시려고 우리를 부르시고 선택하실 때에는 그냥 부르시기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부르심에 합당한 모습이 되고 주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더하여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부르시고 선택하셨을 때에도 그에게 구원의 세가지 권능을 더하여주셨고 그 뿐만 아니라 말 잘하는 모세의 형 아론까지 더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우리의 부르심과 선택하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많은 것을 더하여주신 세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면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받은 나임을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항상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택하여 세우셨다라는 확신이 있습니까? 바울 안에는 이면에 있어서 매우 분명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이 세계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롬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나이고 또한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은 나라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정체성에 대한 변하지 않는 믿음으로 있었기 때문에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자신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이런 확신이 있습니까? 자기 정체성에 대한 변하지 않는 믿음이 있습니까? 마귀가 공격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이것을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리멍텅하게 만들어서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어떻게 공격할까요?
마4장에 보면 마귀가 주님을 시험합니다. 이 시험의 시작을 보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합니다.
마 4: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여러분들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습니까? 이 자의식은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요? 마11장에 보면 흔들리는 세례요한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마11장에 보면 세례요한이 예수님이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 11: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11: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세례요한이 예수님께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처음과 달리 달라지셨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죠. 주님은 처음과 끝이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바뀌거나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바뀐 것은 세례요한의 믿음이 흔들린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정체성이 흔들린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처음 하나님을 만나고 신앙을 했을 때 우리에게 베푸신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결코 변함이 없으십니다. 변한 것이 있다면 우리가 변한 것이고 우리의 마음이 높아져서 교만해진 것입니다.
사울 왕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이 갑자가 변하셔서 사울을 버리고 다윗을 왕으로 삼으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울이 자신을 낮추고 겸손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사울이 이 마음을 잃어버리지 말고 끝까지 유지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울이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임의대로 판단하고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높이는 교만한 모습이 되었던 것이죠. 이런 사울왕에게 사무엘이 뭐라고 합니까?
삼상 15: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15: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왕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도 버림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보면서 흔들리고 바뀔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왜냐면 예수님은 변하지 않았으니까요. 변한 것은 세례요한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알고보면 우리의 마음이 달라지고 우리의 마음이 높아진 것이지 하나님이 달라지고 변한 것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보십시오.
요13장에는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죽음 앞에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던 주님의 이 모습.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이 사랑을 닮아 변하지 않는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해야 할텐데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왜 세례요한이 달라진 것입니까? 그가 주님과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몸만 같이 한다고 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아버지와 늘 함께 했던 탕자의 형이 아버지와 분리가 일어났겠습니까? 몸이 함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하나되어 있는 것이죠. 그러자면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은 연합하게 하고 하나되게 하는 능력입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알기 위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뭐라고 했습니까?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를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엇을 보라는 것입니까? 십자가의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참으시고 피흘려 죽으신 주님의 그 삶을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세례요한이 주님과 함께 하지 못하고 이 사랑일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자신의 정체성이 흔들리니 주님에 대한 믿음도 갈대처럼 흔들리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떠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어떻게 정체성에 대한 확고한 자의식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요 3: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8: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것이 예수님의 자의식이었습니다. 주님이 소속되어 있는 곳이 있었던 것입니다. 소속감이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나의 소속은 어디인가? 남자가 군대가면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 뭔지 아십니까? 관등성명이라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가르쳐줍니다. 이로서 자신이 민간인이 아니라 군인이라는 소속감을 가지게 됩니다. 군대에서 같이 생활하고 훈련하면서 이 소속감이 확고해지는 것입니다.
어떤 단체에 소속되어 있다고 해서 저절로 소속감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참여를 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소속감을 가지려면 그리스도인의 삶에 참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놀라운 것은 말씀은 우리를 말씀대로 살도록 다시 말하면 말씀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고전 9: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복음에 참여하는 것. 내가 복음에 참여하지 않고 복음을 알았다고 말할 수 없지요. 천국의 삶에 참여하지 않고 천국 백성의 삶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삶에 동참하고 참여할 때 비로소 내가 하나님의 형상된 나임을 알고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받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소속감을 가지고 살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를 가고 무엇을 할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신분증입니다. 이 땅에서의 신분증이 있지만 우리는 천국의 신분증을 가진 자들입니다. 이 신분증을 잃어버리지 말고 잘 간직하고 항상 보면서 천국 백성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