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가 쓰시겠다 하라
막11: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11: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11: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11: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11:5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11:6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11: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11:8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1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1: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오늘은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입니다. 또 이번 주는 부활절을 앞두는 고난 주간입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묵상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가는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제 이번주만 지나면 부활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부활은 십자가를 통해서만 온다는 것을 주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창조의 기사도 보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저녁과 아침 사이에는 어두운 밤이 있습니다. 이 밤이 잘 견디고 인내할 때 찬란한 아침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라데이션이라고 아시죠? 디자인 할 때 많이 쓰이는 말인데 진한 부분에서 옅어지게 혹은 어둠은 부분에서 밝아지게 점점 변해가는 것을 말하는데요. 이것을 사용하면 매우 부드러워집니다. 복음을 우리가 한 마디로 말한다면 십자가를 통한 부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 목적은 부활이 이르는 것인데 어떻게 부활에 이를 수 있는가? 검정색과 흰색도 보면 두가지 색을 나란히 놓으면 서로 연결이 안되지만 이 사이를 그라데이션으로 처리해놓으면 매끄럽게 연결이 되면서 매우 자연스럽고 멋있어 집니다.
어떻게 우리가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삶이 될까? 우리의 삶이 부활에 이르는 삶이 되도록 우리의 삶을 매끄럽게 연결해주는 그라데이션 역할을 하는 것이 뭘까? 저녁과 아침 사이에 밤이 있어서 이 둘을 연결시켜주듯이 우리는 부활의 찬란한 영광의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서 십자가가 있는 것이고 우리는 지금 사순절의 기간을 통해 십자가의 기간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십일의 십자가 기간을 통해서 부활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이제 일주일 남았습니다. 이미 많이 밝아진 느낌입니다. 공동체 여러가지 기도제목을 놓고 왔는데 여러가지 것들이 이미 많이 이루어진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의 삶을 부활의 영광이 되게 점점 바꾸어 주시는 것을 많이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도 그러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모든 계획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그 계획을 가지고 우리를 점점 영화로운 길로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믿고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만을 굳게 붙들고 사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마가복음에 말씀을 가지고 종려주일 말씀을 함께 보려고 합니다.
막11: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11: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주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그냥 걸어서 가실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시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스가랴9장9절에 있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슥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어떻게 주님이 우리에게 임하시나?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오신다는 것입니다. 왜 하필 나귀입니까? 아브라함이 창22장에 보면 이삭을 번제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무엇을 타고 이삭을 데리고 갑니까? 나귀를 타고 모리아산까지 갑니다. 나귀는 아브라함과 이삭을 모리아산까지 데려다 준 교통수단인 것입니다. 나귀는 순하고 순종을 잘해서 짐을 싣고 가기도 하고 수레를 끌기도 하고 사람을 태우기도합니다. 지금으로 보면 승용차입니다. 그런데 화려하고 빠르고 값비싼 차가 아니고 짐을 싣고 사람을 태우는 그런 차입니다. 왜 이런 볼품 없는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은 나귀와 같은 주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인의 짐을 대신 들어주고 주인을 섬기며 태워주기도 하고 어디로 가든지 순종하는 나귀. 이것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주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주님의 삶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 바로 나귀였던 것입니다. 나귀의 삶과 예수님의 삶이 같은 것입니다. 내가 신고 있는 신발, 내가 입고 있는 옷, 내가 타고 다니는 차가 어떤 차이냐에 따라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고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것이잖아요. 나귀가 바로 주님의 사역과 주님의 삶과 주님의 성품을 보여주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런 나귀를 데리고 오라고 하시는 것이고 지금도 이런 나귀와 같은 자들을 불러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나귀가 어디 붙잡혀 있는가? 세상의 거짓 주인에 다 사로잡혀 있고 매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풀어서 데리고 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무엇에 매여 있습니까? 나를 붙잡고 있는 것은 뭔가? 세상 사람들 보면 다 저마다 붙잡혀 있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으로 우리를 매이게 하는가? 두가집니다. 빵과 사랑입니다. 빵은 뭐냐? 육적인 양식입니다. 사랑은 영적인 양식입니다. 이 두가지가 해결이 안되면 나귀를 풀어올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이 두가지가 해결되면 나귀를 풀어올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매여 있는 나귀를 어떻게 풀어오시나?
11: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주가 쓰시겠다 하라 – 주께서 쓰시면 주님의 부르심에 쓰임을 받으면 육적인 양식과 영적인 양식이 다 해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지 못할 뿐이죠. 주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자들이 믿고 사는 것은 뭐냐? 세상이 주는 말을 믿고 살죠.
세상은 마치 육적인 양식과 영적인 양식을 다 해결해 주겠다고. 행복하게 살게 해주겠다고. 마4장에 마귀가 주님을 어떻게 유혹합니까? 나에게 경배하면 세상 모든 것을 다 주겠다고. 내가 원하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를 유혹합니다.
육적인 양식도 주고 영적인 양식도 주겠다고. 이것을 우리를 유혹하고 붙잡아 두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믿고 넘어갑니다. 주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은 믿지 못하면서 세상의 말은 어떻게 그렇게 잘 믿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믿음의 근거는 뭘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육적인 세상 속에서 영적인 양식을 준다는 말이 맞는 것입니까? 육적인 양식은 해결해 줄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사람이 떡으로만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결국은 영적인 양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있어야 산다는 것입니다. 육적인 양식을 좇아 살던 사람도 결국은 그것으로 만족이 안되기 때문에 영적인 양식을 또 찾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영적인 양식을 구할 수 없으니 포기하고 사는 것입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 라는 이 말씀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통해서만이 육적인 양식은 물론 영적인 사랑과 진리의 양식까지 얻을 수 있다는 믿음과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마6장에 뭐라고하셨습니까?
마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말씀은 누구에게 하시는 것입니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육적인 양식을 놓고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에게 모든 것을 다 더해주신다고. 우리 몸이 살기 위해서는 육적인 양식이 당연히 필요합니다. 그것을 주님이 왜 모르시겠나? 다 더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줍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들 즉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자면 육적인 양식도 필요하니 그것을 더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뭡니까?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내일 일에 대한 근심과 걱정과 염려에 사로 잡혀 있는 모습 – 이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이 끈을 풀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주님께 있는 것입니다.
요 10: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에게 꼴을 주시고 생명을 얻게 하시며 더 풍성히 얻게 하시는 주님이시라는 것. 우리가 회사를 옮길 때에도 지금보다 더 풍성하게 주는 곳으로 옮기는 것이 아닙니까?
주가 쓰시겠다 – 이 말은 이 매여 있는 나귀의 주인이 누구냐? 진정한 참 주님은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진짜 주인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이용만 하고 쓸 것만 쓰고 더 이상 쓸모가 없으면 버리는 것은 세상의 거짓 주인들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어떤가?
요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0: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0:13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10: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0: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양들을 위하여 목숨까지 아낌없이 버릴 수 있는 목자. 그가 참 목자이고 그 분이 바로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이런 확신이 있습니까? 이런 주님의 사랑을 경험한 자들이 확신을 가지고 매여 있는 자들을 풀러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진정한 참 목자이시고 주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시23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나의 진정한 주인이라는 것이죠.
이후에 바울은 매이고 갇힌 수많은 자들을 풀어 주님께로 데리고 나온 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우리를 주님께로 인도한 자가 있었기에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주께서 쓰시는 자들이 된 것이 아닙니까?
주님의 입성을 보십시오. 이것이 왜 승리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매여 있던 나귀를 주의 제자들이 풀어 왔고 주님께서는 그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셨기 때문입니다.
11: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11:5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11:6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이 말씀을 보면 많은 것들을 묵상하게 됩니다. 제자들이 나귀 새끼를 풀어서 데리고 가는 것을 보고 허락을 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주인이 그냥 허락을 하겠습니까?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나귀의 새끼 주인에게 이미 값을 다 지불했지 않았겠습니까? 세상천지에 누가 그냥 새끼라도 그냥 주겠냐고. 당시 나귀는 매우 유용한 가축이었기 때문에 그냥 아무에게나 주겠습니까? 주님께서 어떤 방식으로든지 이미 그 나귀 새끼에 대한 값을 다 지불하지 않았겠습니까? 바울이 구원을 설명할 때 속량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롬3장에서 설명했습니다. 속량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값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신 것이 아닙니까?
다시 보면 허락했다고 했는데 이미 값을 지불했다면 당연히 허락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값을 지불하지 않았더라도 허락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 나귀를 데리고 있었던 자가 진짜 주인이 아니었다면 말이죠.
갈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3: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주님께로 가게 되면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을 수 없는 것이죠.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라고. 이 나귀의 주인은 진짜 주인이 아니고 주님께로 인도하는 주님이 말씀하시면 언제든지 주님께 내어드려야 하는 청지기 같은 자인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다 그렇지 않습니까? 청지기죠. 영원히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잠깐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 주님의 것이 아닌가? 언제든지 달라고 하시면 내어드려야 하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가 보이는 현상만 보지 말고 보이지 않는 본질을 정확히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진짜 우리의 자리가 어디냐? 나의 소속이 어디냐? 나는 누구에게 소유된 나이고 소속된 나인가? 내가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는가? 나의 왕은 누구인가? 나의 주인은 누구인가? 더 나아가서 나는 누구를 따라가야 하나? 내가 구원을 받고 내가 살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인도하는 자는 진리를 알고 믿음으로 인도하고 인도함을 받는 자는 진리를 정확히 알고 믿음으로 따라가야 되겠습니다. 모세가 믿음으로 인도했지만 따르는 자들이 믿음으로 따라가지 못하면 결국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믿음으로만 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믿음 없던 제자들이 끝까지 갈 수 있도록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끝까지 사랑할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11: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11:8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1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1: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주님을 따르며 찬송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찬송이 있습니다. 찬송은 감사와 기쁨이 있는 자들이 부르는 노래입니다. 세상의 노래와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기쁘게 하고 감사하게 하는 것이 뭐냐? 주님을 만났을 때 주님을 만나 구원 받을 때 또 주님을 따라갈 때, 주님과 함께 입성할 때. 우리 안에 감사와 기쁨이 있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만나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자들이 되어 늘 감사와 기쁨의 찬송이 넘치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번주 고난 주간을 주님 안에서 승리하고 부활의 영광을 맞이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