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al Church

성령을 받으라

 

 

20: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0: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0: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0: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부활절이 지나고 맞게 되는 첫번째 주일예배입니다.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귀한 의미는 소망이죠. 죽고 끝이 아니라 다시 산다는 것입니다. 11:25-26절을 보면 나는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결국 우리의 모든 걱정과 불안과 두려움의 뿌리는 죽음입니다. 그런데 이 죽음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는 말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이미 이 세계가 우리에게 왔습니다. 단지 문제는 이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찾아오시고 이들에게 이 놀라운 세계를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20: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앞에는 무슨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주님의 무덤에 가보았으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가서 내가 주님을 만났다고 말하지만 제자들은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지 못합니다.

16: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16:10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16:11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16:12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16:13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역시 믿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16: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믿음이 없으니 주님께서 책망하십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고 전파해야 할 자들이 오히려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사도가 되는 두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주님과 동고동락한 자이어야 하고 또 하나는 부활의 증인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은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주께서 오셔서 이들을 꾸짖으십니다. 하나는 믿음이 없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마음이 완악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것은 완악한 것과 통합니다. 왜 믿음이 없는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말씀을 잘 들으면 믿음이 생깁니다. 말씀을 들음으로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오고 흡수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딱딱하고 굳어져 있으면 들어가지 못하고 흡수가 안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믿음이 생길 수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아무리 많이 들어도 흡수되지 못하고 들어가지 못하면 믿음이 자랄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길가와 같이 말씀이 씨가 심겨져야 할텐데 그렇지 못하니 새들이 와서 다 먹어버리게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말씀을 들으면 말씀이 들어와 우리 마음밭에 심겨져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심겨지지 않으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완악하다는 것은 완고하고 악하다는 것이고 완고하다는 것은 굳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이렇게 굳어 있는 마음은 없습니까? 우리는 주님과 같이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할 자들입니다. 마음이 단단하게 굳어져 있으면 안됩니다.

그러면 뭘 잘 받아들일 수가 없지요. 굳어 있으니까요. 흡수가 안되는 것입니다. 선한 것까지도 받아들이지 못하면 어떻게 되겠나? 어떻게 이것을 고칠 수 있을까요?

11:19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돌 같은 마음,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이 될 수 있는 길은 우리 속에 새 영이 들어와야 합니다. 가뭄이 되면 땅이 메말라지고 딱딱해집니다. 왜냐면 물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도 딱딱하게 되는 이유는 우리 마음을 부드럽게 해 줄 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 새 영을 주셔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게 되어야 믿음도 자라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부활절을 지나 오순절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새 영을 받아 우리의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항상 은혜가 있고 믿음이 깊어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다시, 본문을 보면

20: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을 두려워해서 문들을 꼭 닫고 있던 제자들에게 주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8:9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24:36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왜 평강을 말하시겠습니까? 이들에게 죽음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하십니까? 평안하십니까? 평안의 반대말은 불안인데 평안이 깨어지면 불안이 옵니다. 마음이 나뉘어지면 즉 마음이 여러 개가 되면 마음이 번잡해지고 혼란스러워집니다. 무엇도 할 수가 없습니다. 불안이 오는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 안에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있었겠습니까? 예수를 죽인 자들이 지금 제자들까지 죽이러 찾고 있지는 않을까? 우리도 잡히면 예수님처럼 십자가형을 받지는 않을까? 말할 수 없는 죽음의 두러움으로 인해 이들의 마음이 다 깨어져 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다보면 여러가지 마음들이 우리 속에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이 생각, 저 생각들이 막 들어와서 자신조차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이 막달라 마리아는 어떤 여자였습니까? 일곱 귀신들이 들어와 있던 여자였습니다. 일곱 귀신이 들어와 있으니 얼마나 시시각각 마음이 바뀌고 변하겠습니까? 좋았다가 우울했다가 이런 말 했다가 저런 말 했다가 왔다갔다 업앤 다운하고.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 속에는 이상한 것들이 들어와 있지는 않습니까? 이상한 행동하고 이상한 말 할 때 있지 않습니까? 지나고 나면 내가 왜 그랬지 할 정도로. 내가 아닌 것 같은 행동. 생각, 말 등등. 이렇게 될 때가 있지 않냐고.

우리 속에 미움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내가 화내고 미워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안 좋아지고 기분이 나빠지고 다운되고 짜증이 나고. 그렇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물어보면 자신도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이유를 몰라요. 우리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하잖아요. 사촌이 땅을 사는데 왜 내 배가 아픈 것입니까? 전혀 그럴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냐고. 그런데 왜 그러나? 바울은 이 현상을 정확하게 우리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7: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내가 행하는 것은 내가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내가 그 때왜 그렇게 했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원하는 것은 하지 않고 내가 싫어하고 미워하고 혐오하는 그것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내가 원하지도 않는 것을 행하는 그것은 도대체 뭔가?

7:16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7: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것은 내가 아니고 내 속에 들어와 있는 죄라고 말입니다. 구원은 우리 속에 들어와 있는 죄를 분리하는 것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먼저는 죄를 아는 것입니다. 이 생각이 내 생각이냐?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인가? 사탄 마귀가 주는 죄의 생각인가? 이것을 가려내야 합니다.

이것이 안되면 그 이상하고 죄적인 생각들이 마치 자신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괴로워하는 것이죠.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은 우리를 하나되게 합니다. 소망을 주고 위로를 주어서 우리를 살게 합니다. 반면에 죄의 생각은 뭡니까? 서로를 어떻게든 분리시키고 분열시키고 갈라지게 만듭니다. 미움을 줄 때도 있고 시기하고 질투나게 하기도 하고 서운한 마음이 들게 하기도 하고. 정죄의 마음을 주기도하고 등등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분명하고 정확하게 말해주었습니다.

5: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이 죄가 어디서 온 것입니까?

1: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1:7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음행과 음난의 죄는 타락한 천사들 즉 마귀로부터 온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5: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5: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이런 것들은 우리의 모습이 아니까요. 이런 것들을 경계해야 한다고. 이런 것들로 인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성령도 못 받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다 다 성령을 받고 성령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속에 이런 죄들이 들어와 있으면 성령이 들어오실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장시치의 소굴이 되어버린 성전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다 뒤집어 엎으시고 내어좇으셨습니다. 우리 속에도 이렇게 성전 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있다면 다 쫓아내야 합니다. 우리 속에 은밀하게 들어와 숨어 있는 죄들이 있습니다. 너무 오래되어서 마치 나의 것 인양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찌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고 그냥 그렇게 사는 모습이 있습니다.

우리의 본 모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자들이니까요.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것은 우리의 본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찾아야 하고 맺어야 할 하나님의 형상된 모습은 무엇인가? 바울은 이것을 성령의 열매라고 했습니다.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런 열매는 어떻게 맺혀지는가? 우리 힘으로 안됩니다. 성령을 받은 자들, 그래서 성령께서 일하셔서 맺혀지는 열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성령을 받아야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앞에서 말한 육체의 소욕들 즉 죄들. 이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어디에 있는가? 성령에 있습니다.

20: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다시 사신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이 기뻐했습니다. 제자들의 이 기쁨은 자신들이 사랑하는 주님의 부활이기 때문에 기쁜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이 우리에게도 기쁨이 되자면 주님이 사랑의 주님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쁨은 사랑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많은 일들도 그렇습니다. 기쁘지 않고 어떻게 인내하며 일할 수 있겠습니까? 의무와 책임과 당위성만을 가지고서 얼마나 갈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구원자의 사명에 대한 의무와 책임만을 가지고 십자가를 질 수 있었겠습니까? 바울은 사랑의 장 고전13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오래 참을 수 있게 하는 힘이 어디에 있나? 사랑입니다. 사랑 사랑의 동기를 잊지 말기를 바라고 그래서 제자들의 이 기쁨이 또한 우리의 기쁨이 되기를 바랍니다.  

20: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주께서 제자들을 보내실 때 그냥 보내시지 않습니다. 평강을 주신다고.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 있는 자들은 주님이 보시겠습니까? 절대 보내시지 않습니다. 주님이 다 아시거든요. 그러나 이제 주님이 제자들을 보내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제 이들이 보낼 수 있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뭐가 달라진 것일까요?

20: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성령을 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즉 성령의 시대가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성령의 시대를 열어주신 것이죠. 이제부터는 성령께서 친히 가르쳐주시고 생각나게 하시고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이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빌바도 알지 못하는 우리를 탄식하시며 간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능력이 많으신 분이 있습니다. 그러니 내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도 다 되는 것입니다. 다 되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하고 찾아보라고 다 됩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닌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 홀로 보내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걱정이 안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성령을 받아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일까요?

20: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죄를 사해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속에 들어와 있는 이 죄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처럼 죄에 사로잡혀 있으나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죄로 인해 고통 가운데 있는 수많은 자들을 죄로부터 자유케 하고 구원받게 해주기 위해서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 하고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가장 중요한 이유인 것입니다.

성령이 아니고서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힘으로 죄를 이기고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성령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지금의 시대를 초고속 인터넷 시대 4G, 5G를 넘어서 6G 시대가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이런 놀라운 시대가 되었다 해도 여전히 2G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아무리 성령의 시대가 되었다 해도 여전히 구약의 시대에 머물러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왜 그럴까요? 전쟁이 다 끝났는데도 전쟁이 끝난지 모르고 산속에 숨어 살다가 발견된 사람이 있는 것처럼 모르면 여전히 이전과 똑 같은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잘 보고 잘 듣고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가까워져야 합니다. 나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무리 발전하고 새로운 시대가 되었다 해도 그것을 모르고 경험하지 못하면 남의 이야기로 밖에는 안들립니다. 이렇게 되면 안됩니다. 다 주셨는데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누구의 잘못입니까?

주님이 주신 평안을 누리시고 성령을 받아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많은 성령의 열매를 맺고 사는 성령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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