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준행하였더라
롬 2: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창 6:14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6:15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6:16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6: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3월도 3분의 1일 지났습니다. 사순절 기간을 가고 있는데 부활절까지 약 20일 정도 남았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와 부활의 종교라고 말할 정도로 부활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다 부활하기 원하는데 그러자면 먼저 십자가가 있어야 합니다. 죽지 않고 다시 살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대부분은 죽지 않고 부활의 영광만을 원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사기를 당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좋은 것만 보여주고 그렇지 못한 것은 가립니다. 쉽게 많은 돈을 벌 수 있고 쉽게 부자가 될 수 있다고 하니 쉽게 넘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 없는 부활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고 있다 해도 그것은 거짓이라고 말입니다.
부활이 있기 전에 반드시 먼저 십자가의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직접 그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보이신 진리요 생명의 길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길을 따라 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길을 찾으려고 하면 안됩니다. 괜히 헛수고를 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요10장에 목자는 문을 통해 우리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문을 통하지 않고 우리에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요 강도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법을 어긴 것이기 때문에 이들이 받은 것을 처벌이고 심판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 가야 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다 부활의 아침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 첫번째 본문은 로마서 2장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로마서2장은 믿는 자들의 죄에 관한 것입니다. 자, 말씀을 다시 보면
롬 2: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칭찬에 관한 것을 사도가 말했습니다. 우리 안에는 어떤 마음이 있습니까? 칭찬 받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뭘 하더라도 잘 했다는 말을 듣고 싶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받는 칭찬이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주님께 책망을 받은 대부분의 이유가 외식입니다.
마 23: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23: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3: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3: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다 외식에 관한 것입니다. 여러분, 외식하면 안됩니다. 왜 외식하게 되는가?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고 하나님의 칭찬보다 사람들의 칭찬을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칭찬받으려 하면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볼 때는 잘 해요.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을 때 사람들이 없을 때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와 안 볼 때 사람들이 있을 때와 없을 때가 다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항상 있지 않지 않잖아요. 홀로 있을 때가 있고.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을 우리는 믿는 자들이지요. 그래서 요셉은 홀로 있을 때에도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보디발 장군의 아내가 요셉을 날마다 유혹했었지만 요셉은 내가 하나님께 죄를 지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창 39:7 그 후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39:8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39:9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을 수 있냐고 했습니다. 이 말은 지금은 아무도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숨길 수 없고 가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늘 동행하시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요셉은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홀로 있는 자리에서도 결코 죄를 짓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늘 나와 함께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졌던 요셉은 사람들이 있든 없든 늘 변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한결 같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 믿음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선악과를 놓고 뱀이 하와를 유혹합니다. 이 자리에 누가 있습니까? 뱀과 하와만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렇게 쉽게 죄를 짓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예배의 자리에도 하나님께 함께 하고 계심을 믿으십니까?
신앙은 뭐죠? 하나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은 외식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외식을 한다는 것은 사람에게 잘 보이려 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직 온전한 신앙은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는 대부분이 잘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잘해야 그것이 진짜입니다.
밖에서는 굉장히 젠틀하고 겸손하고 착하고 낮아지고 섬기는 것도 잘 합니다. 그런데 집안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맘대로 하고 함부로 말하고. 참 이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자기 집이 편안 이유가 바로 자기 편한대로 마음대로 다 말하고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죠. 그러나 자기가 편한 만큼 불편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이 편안함을 내려놓는 만큼 다른 사람들은 편해지는 것입니다.
신앙은 마치 그릇의 겉 뿐아니라 속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겉에만 치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겉도 깨끗하고 속도 깨끗해져야 합니다.
신앙은 종의 마음을 가지고서는 오래 갈 수 없습니다. 잠깐은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곧 지치고 힘들어집니다. 신앙은 아들의 마음 혹은 주인의 마음을 가지고 가야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진짜 아들이 되어야 하고 진짜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마13장에서 천국의 일곱가지 비유를 다 말씀하시고 결론으로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바로 너희가 천국의 집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인의 마음을 가진 주인의 신앙을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가? 보이지 않지만 늘 나와 동행하시고 나를 눈동차처럼 지키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모시고 하나님께 잘 보이고 하나님의 칭찬을 받으려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초점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무엇을 하여야 하나님께 칭찬 받을 수 있는가? 자, 두번째 본문을 보면 이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노아의 방주에 관한 말씀입니다.
창 6:14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6:15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6:16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왜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이 방주는 하나님께서 이 땅을 심판하시고 멸하시기 전에 살려야 할 자들, 죽어서는 안되는 자들, 그들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은 심판하시지만 의인은 반드시 살리시고 구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악인과 의인을 함께 멸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주를 지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다 이렇게 각자의 방주를 지어야 합니다. 그 방주를 통해서 먼저는 자신이 살고 자신들의 가족을 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지으라 하신 이 말씀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마25장을 보면 달란트 비유가 나옵니다. 여기보면 주인이 자기 종들에게 타국으로 가기 전에 자신의 소유를 맡겨주고 떠납니다. 이들에게는 시간과 돈이 얻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뭘 해야 할까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있고 우리가 가진 것이 있다면 그것으로 뭘 해야 할까요? 뭔가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간과 돈이라는 것은 결국은 다 흘러가는 것이고 돌고 도는 것이니까요. 이것이 나에게 있을 때 우리가 해야 일이 있는 것입니다.
다섯달란트 받은 자와 두 달란트 받은 자는 자신이 받은 것으로 장사를 해서 이윤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후에 주인의 칭찬을 받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책망을 받습니다. 왜 입니까? 그는 한 것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신이 받은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었습니다. 이 종은 자신의 일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직무유기입니다.
칭찬과 책망의 기준이 뭔가? 남이 남겼느냐? 적게 남겼느냐가 아니고 자기 일을 했느냐? 안 했느냐? 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맡겨진 일이 있고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이것을 사명이라고 합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만물을 다스리라는 분명한 사명을 우리는 다 가진 자들입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구원이라는 분명한 목적과 푯대를 가지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온 마음과 뜻을 다해 일하셨습니다.
요 4: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을 자신의 양식으로 삼아 일하셨습니다. 우리가 매일 같이 밭을 먹는 것처럼 그렇게 매일 매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사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주님의 사명을 온전히 이루기 위한 마침점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마지막 자리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요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주님의 말할 수 없는 희생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남은 것은 뭘까요?
빌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주님께서 이루어주신 구원이 있지만 또 우리가 이루어야 할 우리의 구원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자기를 찾기만 해도 상을 주시려고 stand by 하고 계시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했습니다. 우리가 엄청난 일을 해서 하나님께 상을 받고 칭찬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찾기만 해도 상을 주시고 칭찬을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노아에게 지으라 명하신 방주는 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결국은 자신과 자기 가족을 위한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한 일인데 뭐 칭찬받을 게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칭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자리에서 우리가 해야 할 남겨진 구원의 사명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칭찬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우리 지체가 함께 지어가야 할 방주가 있고 또 우리 각자가 지어야 구원의 방주가 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를 위한 방주이고 우리의 가족을 위한 방주인 것입니다. 이 방주를 열심으로 우리의 양식 삼아 지어가야 하겠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방주를 완성했습니다.
6: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사순절 기간 주님께서 다 이루어 주신 구원의 길을 보면서 우리도 우리가 이루어야 할 사명을 어떻게 하면 다 이룰 수 있을지를 고민하면서 온전한 구원의 방주를 이루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