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눅12: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12: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12: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12:52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12:53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은 주님의 사역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 땅에 주님이 오신 목적이 무엇인가? 크게 보면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죠.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우리가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되는가? 과정이 있습니다.
눅12: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주님께서 이 땅에 불을 붙이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 불은 어떤 불일까요?
마 3:11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세례요한이 주님에 대해 증거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물세례가 있고 성령 세례가 있는데 성령을 불로써 비유한 것입니다. 불은 뜨겁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으면 마음이 뜨거워지고 그래서 속에 있는 죄가 뜨거운 성령의 불로 다 태워져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것은 물과 불입니다. 물은 우리의 행실을 씻어서 깨끗하게 하는 것이고 불은 우리의 속에 있는 이 죄를 태워서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성령의 불, 말씀의 불을 반드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땅에 우리의 마음의 땅에 이 불을 던지러 왔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불이 잘 붙지가 않는 것입니다. 다시 주님의 말씀을 보면
눅12: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12: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붙기만 하면 더 원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을 붙이는 것이 주님의 모든 사역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역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불 붙이는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전도를 해보면 사람들이 정말 차갑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살기는 좋아졌는데 갈수록 서로 말도 잘 안하고 매우 차가워진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전에 낯선 곳을 가면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 갔었는데 이제는 물어볼 필요가 없어요. 네비가 다 알려주니까요. 물어보는 사람이 이상할 정도가 되어버렸습니다.
불을 붙이려면 말을 걸고 해야 하는데 말 거는 것부터 낯선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니 불 붙이가 쉽겠습니까?
50절에는 주님께서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고 하십니다. 이 세례는 어떤 세례입니까? 현대인의 성경을 보면 이 세례는 고난의 세례라고 했습니다. 왜 주님이 고난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주님께서 죄 많은 우리 가운데 오셔서 성령의 불, 말씀의 불을 붙여주시고자 하시는데 이 불이 잘 붙으면 고난 받을 일이 없을텐데 이 불이 잘 붙지를 않는 것입니다.
뭐 때문에 불이 안 붙겠어요? 물에 젖어 있으면 불이 잘 붙을 수가 없지요.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거하셔야 하는데 우리 안에 축축한 물이 있으면 성령께서 거하실수가 없습니다.
노아의 방주에서 노아가 비둘기를 내보내는데 첫번째 비둘기 두번째 비둘기는 다시 돌아옵니다. 물이 아직 땅에 있어서 거하지를 못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런 모습이라면 성령의 불이 붙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뭐가 있습니까? 죄가 있잖아요. 못된 죄가 있어요.
참으로 교만하고 지독하게도 불순종하는 모습.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고 하나님을 우상으로 바꾸고 그러면서 우리의 삶이 점점 왜곡되고 탈선하게 됩니다. 어디까지 갑니까? 순리를 역리로 쓴다고.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타락하게 되는데 특별히 성적으로 타락하게 되어 동성애까지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로마서1장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받으신 고난의 세례라는 것은 그 누구 때문에 아니라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죄로 말미암은 고난인 것입니다. 이것이 제거가 되어야 하고 해결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이 붙겠습니까? 주님이 답답하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이 불을 빨리 우리에게 붙여주시려고 하시는데 잘 붙지를 않으니 너무나 힘들고 답답한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답답합니까? 못 알아들을 때, 말하는 사람도 그렇고 듣는 사람도 그렇고 서로 답답합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주님께서 참 답답하셨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별설교에서 하신 말씀을 보면 지금은 알지 못하나 후에는 알리라 – 이런 말씀도 하셨고 또 지금은 따라오지 못하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당시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참 주님의 마음과 주님의 말씀을 잘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모습이 많았습니다. 그러니 이상한 말 하고. 동문서답하고. 마지막 기도하는 자리에서조차 졸고 있고. 이게 또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내가 나를 봐도 참 답답한 모습이 많고 부족하고 연약하고 죄 많고 너무나 어린 모습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그런 우리들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또 말씀하시고 또 가르쳐주시고 또 몸소 보여주시고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주님께서 원하시는데로 결국 제자들이 다 성령을 받고 멋있게 주님의 길을 좇아 사는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제자들의 모습과 사도행전에 기록된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너무나 근본적으로 달려져 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우리도 다 이렇게 변화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의 길이라는 것은 바로 이렇게 불을 붙이는 과정인 것입니다. 먼저는 자기 자신에게 불을 붙여야 합니다. 내가 불에 붙어 있어야 다른 사람도 붙여줄 수 있으니까요.
사단이 하는 일은 뭘까요? 사단은 늘 불을 꺼뜨리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잠깐 졸면 이미 꺼져 있습니다. 불이 꺼지고 불이 나가면 어두워집니다. 자신을 환하게 밝혀줄 있나?
열처녀 비유를 보면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등과 기름을 가졌지만 어리석고 미련한 처녀는 등은 있지만 기름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불이 꺼져간다고.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신랑을 만나지 못하고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의 불, 말씀의 불이 항상 깨어서 꺼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레위기를 보면 여러가지 제사법이 나오는데 그 내용 중에 단 위에 불을 피워 꺼지지 않게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말씀이 불이 꺼지면 안됩니다. 그래서 신앙은 꾸준함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늘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실천하면서 말씀의 불이 꺼지지 않을 때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이 있는데 불이라고 다 같은 불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불이 아닌 다른 불을 앞세워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새번역]레 10:1 아론의 아들 가운데서, 나답과 아비후가 제각기 자기의 향로를 가져다가, 거기에 불을 담고 향을 피워서 주님께로 가져 갔다. 그러나 그 불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명하신 것과는 다른 금지된 불이다.
10:2 주님 앞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을 삼키니, 그들은 주님 앞에서 죽고 말았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불이 아닌 다른 불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불을 받고 그 불을 또 다른 이들에게 붙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불을 붙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 다른 불이 들어와 있지는 않은지 잘 봐야겠습니다.
우리 가운데 주님이 주시는 성령의 불, 말씀의 불이 타오르면 어떤 역사가 일어날까요?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2: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12:52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12:53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누구보다도 뜨거운 불 같은 주님께서 가는 곳곳마다 싸움이 그치고 서로 화목하게 되고 화평하게 되는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내가 화평을 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했습니다.
산상수훈에 보면 여덟가지 복을 받는 사람들에 관해서 나오는데 그 중에 하나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마땅히 화평하게 하고 화목하게 해야 하는 것인데 오늘 본문에서는 화평이 아닌 분쟁을 일으키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십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세상이 거짓된 평화와 위장된 평화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도 그렇습니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 처럼 행동합니다. 관계성에서도 겉으로는 너무나 잘 지내는 것 같아 보입니다. 서로를 너무나 아끼고 사랑하고 가까운 친구처럼 그런데 속에는 미움이 가득하고 시기질투가 가득한 것입니다.
이런 거짓되고 위장된 평화가 먼저 깨어지고 부서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겉은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마음은 너무나 힘들고 괴로운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것들이 먼저 다 부서지고 깨어져야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진정한 화평의 관계가 되고 진정한 평화의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주님의 불 같은 말씀이 위장되고 거짓된 평화를 깨트립니다.
사 24:19 땅이 깨지고 깨지며 땅이 갈라지고 갈라지며 땅이 흔들리고 흔들리며
24:20 땅이 취한 자 같이 비틀비틀하며 원두막 같이 흔들리며 그 위의 죄악이 중하므로 떨어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말씀입니다. 땅이 깨어지고 갈라지고 흔들린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디디고 살고 나를 지탱케 해주었던 우리의 땅이 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진리라고 생각했던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 등등. 이것이 잘못된 땅이었다면 먼저 이 땅이 다 깨어지고 갈라지고 부서져야 합니다. 우리의 이 땅이 깨어지고 우리의 가치관이 종말을 맞이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심판을 받고 종말이 되어야 주님이 주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선물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요4장에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와의 대화를 보면 생수를 얻기 위해서 여자에게 먼저 너의 남편을 데리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이 여자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자신은 남편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이 여자의 말이 참되다고. 그들은 전부 너의 남편이 아니라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새 신랑으로 맞이하려면 이전의 거짓 남편들을 정리해야 합니다. 정리가 안되면 어떻게 될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와서 가나안까지 가자면 애굽의 삶을 정리해야 합니다. 애굽을 나와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광야의 길을 가고 있는데 과거의 애굽의 삶이 정리가 되지 않으니 조금만 힘들고 부족하고 고난이 오면 애굽의 삶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 때를 그리워하며 다시 돌아갈 생각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것을 아시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험난한 곳으로 가게 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나는 어떤 길로 가고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길로 영화로운 길로 인도하시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고 믿음을 합하여 순종함으로 나아가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은 정확하고 절대적인 선의 기준이 되고 우리가 따라가야 할 길이기 때문에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이전의 자신의 생각들과 부딪힙니다. 따라서 분쟁이 일어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분쟁에서 주님의 말씀이 승리하면 이제 이 분쟁이 자기 집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다섯 사람 중에 셋이 둘과 둘이 셋과 또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집에서 같이 사는 가족들 사이에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멀리 있는 사람과 이런 분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늘 얼굴을 보면서 함께 사는 가족들 사이에서 이런 분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삶이 달라지고 변화가 생기고 그것이 삶으로 겉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예전과는 말도 달라지고 생각도 행동도 달라진 것을 누가 먼저 알아 보겠는가? 같이 사는 가족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제대로 하게 되면 변화가 일어날수록 좋은 일 보다는 오히려 힘들고 어려운 일이 더 많이 생기게 됩니다. 가장 먼저 일어나는 일들은 가족 간에 분쟁과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이것이 고난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고난은 우리의 소망을 가져다 주기 위한 고난임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알았기에 환난 중에도 기뻐하고 즐거워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 믿음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화평이 아니라 분쟁케 하기 위해 내가 왔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을 따라 제대로 신앙하면 반드시 이런 분쟁이 먼저 오는 것입니다. 불이 붙은 사람과 붙지 않은 사람이 같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분쟁은 언제 끝날까요? 가까이 있는 자들에게 이 불이 다 옮겨 붙으면 이 분쟁은 사라집니다.
내가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다면 내 안에서 먼저 평안이 옵니다. 그리고 이제 이것이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과 우리의 친구들에게 오고 그들이 다 믿으면 이 분쟁은 사라집니다. 우리는 여기까지 가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분쟁이 다 사라질 때까지. 이를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불이 붙어야 합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주님의 이 말씀을 잘 기억하면서 우리도 주님과 같이 이 땅에 성령의 불을 가지고 많은 이들의 마음에 이 불을 붙여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