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접
마10: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마10장은 제자를 파송하실 때 하셨던 주님의 말씀입니다. 즉 파송설교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한 구절을 보려고 합니다.
마10: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 이 말씀을 잘 보면 하나님은 예수님과 함께 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수 있고 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12:44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12:45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여기에서 주님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라고 하셨고 또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 두 말씀을 잘 보면 하나님은 누구와 함께 하시고 누구를 통해서 보여지시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과 함께 하시고 또 예수님을 통해서만 보여지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자는 곧 하나님을 믿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바꿔서 말하면 하나님은 아들이 아니고서는 볼 수 없고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예수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다른 길을 통해서 하나님께 가려해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보이지 않고 알 수 없는 하나님을 이 땅에 알려주시고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아들 예수외에는 다른 길을 주시지 않은 것입니다.
요 10: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10: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10: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이 땅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 보다 먼저 왔다 할지라도 그런 자는 절도요 강도라고 했습니다. 마치 계주를 하는데 바통없이 제 아무리 1등으로 들어왔다 할지라도 그것은 무효가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1등의 자리를 훔치려는 절도요 강도가 될 뿐입니다.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7: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서는 아무리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하여도 불법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한 것인지 사람의 뜻을 따라한 것인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다 불법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신 예수를 통하지 않고서는 불법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교만해질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하나님께 갈 수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예수가 필요없다든지, 예수가 아닌 다른 그 무엇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한다든지 그러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야 하고 늘 붙어있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나는 무엇에 연합되어 있는가? 내가 예수님과 연합이 안되어 있는데 하나님과 연합이 되겠습니까?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하나님을 영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있고 잘못된 감정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알고 싶다면 예수님을 잘 알면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생각, 예수님의 사역 등등. 모든 것이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 5: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5:19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들은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고 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봐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아들을 아는 자는 아버지 밖에 없는 것처럼 아버지를 아는 자는 아들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를 더하셨습니다. 이들은 사도들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직접 갈 수가 없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 왜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을 받아주시기 않고 아벨의 제물만을 받아주신 것일까요?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아벨의 제사는 믿음의 제사였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제사가 아니고서는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자들인가? 하나님께 믿음의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자들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얼마나 많은 불신과 교만과 불순종이 있는가? 이런 모습으로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으며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제사를 받아주시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제사를 드리는 자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누구였는가? 오직 한분 예수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히 12:24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예수님의 피는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뿌린 피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과 순종의 제사였기 때문입니다.
믿을 수 없고 순종할 수 없는 자리에서 예수님은 믿음으로 십자가를 지셨고 순종하심으로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이 감사함이 있는가?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었고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의 평생의 사역 중에 하나는 하나님을 잘 알게 해서 끊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중보하는 사역이었습니다.
딤전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이렇게 예수님께서 중보의 사명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중보자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백성이 된 자들의 사명은 뭘까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듯이 이제는 사도들을 통해 예수님을 알게 된 것처럼 이제는 우리들을 통해서 예수를 알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을 보겠습니다.
마10: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제자들은 주님을 대신하는 대리인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자리에 예수님이 있었던 것처럼 주님을 대신하는 자리에 우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우리가 정말 복음의 삶을 잘 살아서 우리를 통해 간접적으로 주님을 보여주고 주님을 만나게 해주어야 합니다. 우리를 잘 영접하면 그가 주님을 영접하고 구원을 얻게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길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사도들도 얼마나 두려운 마음, 떨리는 마음으로, 공적으로 살았겠습니까? 우리의 자리도 동일한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사도들처럼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지고 공적인 마음, 대표의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영접하게 할 수 있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