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5).
바울은 “속량(贖良)”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주님이 제물이 되어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속죄양(Scapegoat)이 되어서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해주시려고 여자에게서 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는 방식은 상상할 수 없는 방식입니다. 이런 죽음을 한 마디로 ‘어리석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에 ‘하나님의 어리석음’에 대해서 썼습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 보다 지혜롭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3-25).
히브리서 기자는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셨다”고 했습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히 2:14). 이것을 교리적으로 설명하면, 이것은 속량(贖良)과 연결됩니다. 속량(贖良)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죽은 것입니다. 이것은 대표이론입니다. 대표이론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는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나무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에게 붙어서 주님이 죽을 때 같이 죽고 주님이 살아나실 때 같이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로마서 5장의 말씀입니다. 인류가 아담에게 붙어 있어서 아담이 죄로 인해 죽을 때 모든 인류가 죽었습니다. 한 사람 아담의 죄로 인해 사망이 들어왔고 모든 인간이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죄와 사망으로부터 우리 인간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구속의 주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속죄양이 되어서 우리의 죄를 다 담당하시고 죽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대표이론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대표로 해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청산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합법적인 것입니다. 이미 주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고 죽으셨기에, 누구도 더 이상 우리의 죄를 물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주님이 율법아래 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우리를 속량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주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우리를 속량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속량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속량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그것을 여기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종이 되지 않고 아들이 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에 바울이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6).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롬 5:8a). 여기 우리가 “연약할 때”와 “죄인 되었을 때”라고 했습니다. “연약함”과 “죄인되었다”는 말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인간은 법을 깨면 죄인이 되는데, 모든 인간은 연약하여 법을 깨고 죄인이 되었습니다. 율법을 온전히 지킴으로 죄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도는 인간 육신의 연약함을 너무도 절실히 깨달았던 사람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은 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완벽한 자유, 완벽한 죄로부터의 해방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연약함으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더 이상 종의 멍에를 메지 않고 자유함을 얻은 아들이 되게 해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3년의 아라비아의 기간 동안 이것을 묵상했고 자기가 얻은 자유함을 확신했고 이 자유의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14년이 지난 후에, 그것이 맞다는 공인을 예루살렘회의에서 받은 것입니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셨다고 했습니다. 아들의 영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이 영이 우리 가운데 와야 우리가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오신다는 것은 성령이 오신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일체입니다. 여기 바울이 너희가 아들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아들의 영이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종이었을 때는 우리가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들이 되었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 10:19). 우리가 담력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전에는 우리는 진노의 자녀로서, 하나님은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은 진노의 하나님이었고 그러므로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을 수 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제 아들이 되어서 성소로 들어갈 담력을 얻게 되었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아바”라는 것은 “아빠”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아바, 아버지”는 아주 친근한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근한 사랑의 관계가 회복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4:7).
이제는 우리가 더 이상 종이 아닙니다. 아들이 되었습니다. 아들은 유업(遺業)을 받을 자입니다. 아들은 모든 것을 상속받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모든 것과 그가 가진 모든 권세를 누구에게 줍니까? 아들에게 줍니다. 우리는 아들이기에 상속자이고, 그러므로 주의 모든 것을 유업으로 받을 자가 되었다고 바울은 지금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이라는 자의식과 정체성이 우리 안에 생기면, 모든 것이 달라지게 됩니다.
예수님 안에는 두 개의 정체성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나는 이 세상을 구원할 구원자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런 아들로 회복되어서 그 권세를 드러내고 살기를 주께서 바라셨고, 그것을 주께서는 삶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바울 사도가 오늘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은 다 초등학문이라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사람들이 하늘에 있는 일월성신(日月星辰)을 이용해서 점성술을 행했습니다. 그것들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지배하고 살았습니다. 온갖 거짓 신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다 초등학문인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은 다 구원의 대상인 것입니다. 다 하나님의 아들의 발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한들, 그것은 다 공중 권세입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아들의 것이요, 아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우리의 것입니다. 모든 권세가 아들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들의 유업을 받을 상속자입니다.
바울 사도 안에는 이런 정체성이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당당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은 아그립바 왕과 펠릭스 총독 앞에서 당당합니다. 번쩍이는 제복을 입는 문무백관들 앞에서 재판을 받으면서도, 바울은 전혀 떨지 않습니다. 당당하게 바울은 “각하여, 원컨대 당신도 주를 믿고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총독은 “네가 아주 고상한 지식인인 줄 알아서 기회를 주려고 했는데, 네가 미쳤구나”라고 말합니다. 그들 앞에서 바울은 아주 당당했습니다. 그에게는 그들이 다 불쌍한 인간들이었습니다. 구원이 필요한 영혼들이었습니다.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여러분 안에 이런 정체성이 살아 움직이길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들은 담대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큰 일을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