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al Church

 

19: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9:17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9:18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19: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19:20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19: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19: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오늘 말씀은 한 부자청년이 주님께서 와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물어보는 것입니다.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요? 영생을 알려면 먼저는 십자가와 부활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죄수를 가장 고통스럽게죽이는 형벌의 하나였습니다. 죄수가 형벌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문제는 예수님이 죄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정의가 뭡니까? 죄인을 벌하고 의인은 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정의로워할 법을 가지고 재판하는 법정에서 죄 없으신 주님이 죄인이 되고 십자가의 형벌을 받아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죽어서는 안되는 분이 죽임을 당한 사건.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것만큼 억울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해할 때 먼저는 이것이 억울한 사건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죽임당하신 어린양이라는 찬양도 있듯이 주님은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살인을 당한 것입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고 내가 범죄한 것이 없는데 뭔가 벌을 받고 손해를 받는다고 느낄 때 우리는 어떠냐? 참지 못하잖아요. 20장에 나중 온자가 1데나리온을 받으니까 먼저온 자들이 마치 자신들이 뭔가 손해본 것처럼 참지를 못합니다. 원망하고 불평하고 미워하고. 약속한 만큼 다 주었는데도 못 참아요. 억울할게 없는데도 억울해 하는데 하물며 진짜 억울한 일을 당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돌아버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 예수님이 받았던 심문의 그 자리는 예수님이 죄인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려는 법정의 자리가 아니고 예수님을 어떻게든 죄인으로 만들어 죽이려고 했던 살인의 자리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거짓 증인들을 세운 것이 아닙니까?

주님의 십자가는 참으로 억울한 것임을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쓴 것이구나. 창세기 마지막 인물 요셉을 우리가 예수님의 예표라고 하는데요. 요셉도 이렇게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쓰고 감옥에 갇히는 죄수가 되었잖아요.

사람이 정말 참기 힘든 감정 중에 하나는 억울한 감정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억울한 일 한 두번 당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이 왜 억울할까요? 누구도 내 마음과 내 상황과 내 심정과 내 사정을 못 알아주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믿었던 사람마저 나를 오해하고 불신하고 이해해주지 못하고 나를 떠나고 버릴 때 얼마나 힘들고 괴롭겠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떤 자리였습니까? 믿었던 제자가 배신하고 믿었던 제자들이 부인하고 떠난 자리였을 뿐 아니라 하나님도 버리신 자리였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사람들은 그럴 수 있지요. 그런데 하나님도 나를 버리시다니.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러시면 안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나의 하나님도 철저히 버리신 버림의 자리였던 것입니다.

아니,,,왜 하나님 어떻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 사람들은 다 외면하고 버리고 떠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러시면 안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왜 그러셨을까요?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하니까 그렇게 밖에 할수 없기 때문에 하는 세계. 이런 세계가 있잖아요.

사랑하는 아들이 뭘 사달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사달라고 하니 부모의 입장에서 당연히 사주고 싶지요.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없는 말못할 부모의 여러가지 사정이 있지 않겠습니까? 부모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에 가져야 할 마음이 무엇입니까? 무슨 사정이 있겠지..

예수님의 자리는 형벌의 자리입니다. 즉 형벌을 받고 있는 것. – 어떤 형벌이냐? 철저한 버림의 형벌을 받고 있는 것 누구를 대신해서 죄인이 받아야 할 형벌을 주님이 대신 받고 있는 것입니다. 감하면 안됩니다. 고통을 줄여주는 쓸개 탄 포도주를 마시지 않은 이유가 뭡니까? 한치의 흠도 없이 모든 죄의 형벌을 온전히 모조리 남김없이 다 주님께서 받기 위해서. 그렇지 않으면 사탄의 참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어떤 부모가 버리겠습니까? 그런데 버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철저한 버림. 철저한 외면, 누구 하나 주님을 증거해주지 못하고 함께 해 주지 못하고 하나님도 버리신 그 자리에서 주님은 사람들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하나님도 원망하지 아니하고 말도 안되는 죄인의 누명을 쓰고 홀로 외롭게 십자가를 지시고 피흘려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죄 없으신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그 누군가가 받아야 할 모든 죄값을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누가 받아야 할 죄값이었나? 모든 죄인이 받아야할 죄값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십자가가 참으로 값비싼 대속 십자가가 되고 나를 위한 사랑의 십자가가 되는 것인데 내가 죄인임을 알지 못하고 나는 죄 없다 하면 주님이 받으신 그 억울한 십자가가 이제는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참으로 쓸데 없는 십자가, 매우 어리석고 미련한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있어서 주님의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십자가라는 것이 말할 수 없는 큰 사랑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까? 가롯유다는 향유옥합을 깨뜨린 것을 사랑으로 보지 못하고 허비와 낭비로 봤습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볼 수 있습니까? 주님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셨듯이 우리 자신도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속죄의 마음으로 전부 대속해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인이 받아야 할 모든 죄값을 다 치러주신 것입니다. 죄의 형벌의 기간이 끝난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아 자유를 잃어버리게 되는데 죄수가 언제 다시 자유인이 됩니까? 자신이 받아야 모든 벌을 다 받으면 다시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 땅의 모든 죄값을 다 받으셔서 이제 다 끝난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죽어야 할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당신의 모든 사역을 다 끝 마치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아들을 버려 두실 이유가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그리스드로를 다시 살게 하신 것입니다. 부활입니다. 주님은 죽으실 이유가 없었으니까요. 사단의 참소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 관하여서도는 마찬가지이죠. 우리는 예수님 덕분에 우리의 죄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죄의 형벌인 죽음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부활과 영생인데 이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오게 되는가? 나를 믿는 자는 이라고 했습니다. 믿음. 믿음으로 부활과 영생의 세계가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한 부유한 청년이 주님께 와서 영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합니다.

이 말씀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다 기록되어 있는 말씀인데요. 누가복음에는 관원 관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나라의 녹을 먹는 사람이 부자일 수 있는가? 부자일 수 있지요. 이 부자가 물질적인 부자만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다 영적인 부자들입니다. 뭐를 가지고 있어야 진정한 부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 부자청년은 부자인데 뭘 더 가지려고 하는가? 영생이었습니다. 우리는 영생을 가진 자들입니까?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고 생각되면 이 말씀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19: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9:17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9:18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19: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19:20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이 청년안에는 떳떳함이 있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 할만한 것들은 다 했다는 것입니다. 훌륭합니다. 이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할만큼 했으니 내가 원하는 것을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이런 마음 없습니까? 하나님께 내가 해야할 것. 지켜야 할 것들. 이런 저런 것들 많이 했으니 내가 원하는 것을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왜 내가 원하는 것은 주시지 않습니까?

이런 물음이 있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말씀해주셨습니다.

19: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까? 계명을 잘 지키는 것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고 자신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주를 따르는 것. 누가복음에 보면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가능한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이 부자청년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19: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왜 계명을 잘 지켰던 이 청년이 자신의 소유를 내어놓지 못했을까요? 여러분은, 이 세계를 넘어설 수 있을까요? 결국은 또 소유의 문제입니다.

나의 것을 내어놓으려면 그냥은 절대 안됩니다. Input이 있어야 output이 있는 것처럼 먼저 내가 채움이 있어야 하고 받은 것이 있어야 하고 충만한 세계, 넘치는 세계가 있어야 합니다.

이 부자청년은 지금 누구를 만난 것입니까?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4장에 보면 예수님이 어부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을 제자 삼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 이들도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같은 주님을 만났지만 다릅니다.

4장에서 주님이 제자들을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얻어서 충만해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먼저 채워지는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려면 먼저 내가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로 서로 사랑하게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만나고 이 세계를 경험한 것입니다. 19장에 보면 삭개오가 나오는데 삭개오가 나중에 어떻게 됩니까?

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돈만 알던 세리장이었던 삭개오가 어떻게 자신의 피 같은 돈을 내어놓을 수 있었나? 주님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부자 청년은 주님은 만났지만 주님을 얻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만난 자들입니까?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얻은 자들입니까? 만나기는 했지만 얻지는 못한 자들입니까?

왜 이 부자청년은 주님을 만났어도 주님을 얻지 못했을까요? 주님이 이 청년에게 충만한 은혜의 세계를 주려고 해도 이 청년 안에는 자신이 한 것에 대한 의가 가득 채워져 있었기 때문에 뭘 더 담아줄수도 부어줄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부자라는 말의 의미를 잘 묵상해보십시오. 가득 채워져 있는 것입니다. 가득 채워져 있으니 더 이상 담을 수 없습니다. 새로운 것을 담으려면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들을 비워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비우라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가? 나의 의로 가득 채워져 있지는 않는가? 나의 행위나 공로로 얻은 것들. 다시 말하면 내가 노력하고 열심히 수고해서 얻은 것들이라면 그것은 누가 뭐라해도 내것이기 때문에 결코 쉽게 누군가에게 내어줄 수 없는 것이 됩니다.

16장에 보면 불의한 청지기 비유가 나오는데 이 청지기가 주인의 것을 허비한다는 말이 주인에게 들리자 이 청지기가 직분을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청지기가 한 것은 주인에게 빚진 자들의 빚을 탕감해주었습니다.

16:1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16:2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16:3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16: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16:5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16:6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16:7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어떻게 청지기가 이렇게 바뀔 수 있었을까요? 이 청지기는 주인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를 위해서 썼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는 빚쟁이들의 빚을 탕감해 준 것입니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 절대 그렇게 못합니다. 내것인데 주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은 전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내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내것이 아닌데 우리는 어떻게 많은 것들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은혜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왜냐면 우리가 뭘 해서 하나님 앞에 뭘 얻어낼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어부나 세리나 창기들은 이 세계를 먼저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을 만났고 주님을 얻은 자들이 된 것입니다. 이들은 뭘 비웠습니까?

19: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19: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19: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나 모든 것을 다 비워도 아깝지 않은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주님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영생은 주님을 얻은 자들, 주님의 삶을 따라가는 자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영생을 얻는 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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